01 . '회사를 다니기에도 버거우실 것 같은데 글은 언제 쓰시나요?'
아마 제가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받은 질문 중에 가장 빈도가 높았던 질문일 겁니다. 이 질문을 하시는 분들께서도 대부분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일 테니 당연히 본인의 하루하루가 머릿속에 그려질 테고, 그러고 보면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고 또 책으로 엮어내는 누군가의 삶이 신기할 수도 있을 테니 어찌 보면 합리적인 궁금증일지도 모릅니다.
02 . 뭐.. 시간 관리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겸손이란 조미료를 섞어서 얄팍한 훈계를 두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을 받으면서는 그동안 제가 어떻게 글을 쓰고 있었는지, 또 글을 쓰기 위해 작게나마라도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그중에서 '오, 이런 건 한 번 소개해 봐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지점에서 또 한편의 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네 맞습니다. 그 글이 지금 여러분들께서 읽고 있는 바로 이 글입니다.
03 . 우연히 책을 읽다 '화이트 포비아(white-phobia)'라는 단어를 접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딱히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단어는 아닌 것 같지만 대충의 의미를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창조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하얀 도화지나 빈 악보, 아무것도 타이핑 되지 않는 프로그램의 시작 화면과 마주하며 느끼는 막연한 공포'.
물론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매일 마주하는 장면 중 하나가 새로운 페이지를 열고, 새로운 메일을 쓰고, 새로운 문서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이런 현상이 '포비아'라고 부를 만한 것인가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날은 저도 그 막막함이 한편으로는 공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어젠다나 막막한 미션이 떨어질 때면 눈앞에 놓인 하얀 화면은 더더욱 미지의 영역처럼 큰 공포감을 던져줄 때가 많기 때문이죠.
04 . 다시 글 얘기로 한 번 돌아와 보겠습니다. '나는 언제 글을 쓰는 게 가장 편할까?'라고 생각해 보면 대부분 주말 낮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직장인으로서는 당연히 (그리고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시간대가 주말인 것도 있지만, 좋아하는 운동을 마치고 개운하고 씻은 다음 책상 모니터 앞에 앉아 '이제 글을 한 번 써볼까?'라고 마음먹는 그 시간이 저 개인적으로는 꽤 애정 하는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때 제가 바로 막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타이핑을 시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보통 대부분의 시간은 일단 워드를 켜고 하얀색 바탕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서 '근데 뭘 쓰지...?'라는 생각을 하는 시간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05 . 물론 여기서도 '그러니 끝까지 엉덩이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게 중요한 겁니다'란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저도 이때부터는 각종 딴짓을 하기 시작하거든요. 일단 흰 바탕화면을 그대로 둔 채 눈에 보이는 집안일도 좀 했다가, 괜히 커피 한 잔을 내린 다음 창밖에 지나가는 차도 좀 구경하다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불도 좀 털었다가, 침대 맡에 있는 책을 들어 밀린 페이지들을 읽어나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딴짓에 딴짓을 곁들이는 행위인 거죠.
06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여전히 책상 앞 PC의 모니터는 흰 바탕 화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지금 딱히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니 다른 거나 하자'라고 프로그램을 내려버리는 대신 하얀색 화면은 그대로 띄워 놓은 채 어딘가로 글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활동을 시작하는 거죠. '제아무리 시시한 일상의 루틴이라도 뭔가 발에 채이는 게 있다면 내 반드시 글감으로 만들어 돌아오리라'는 각오를 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산책을 나가거나 카페를 다녀오거나 심지어 개인적인 약속이나 일정을 소화하고 오는 동안도 제 PC 화면은 늘 흰 바탕화면을 유지하고 있죠.
07 . 제가 봐도 다소 미련한 짓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해서 강제로 쓰여진(!) 글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주말 동안 뭐라도 써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게 글감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크든 작든 일단 제 레이더망에 들어온 소재들을 가지고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찌저찌 한편의 글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니까요. 마치 '삼시세끼'란 프로그램에서 유해진 님이 차승원 님을 향해 "일단 뭐라도 준비하고 있어봐. 안되면 내가 어디 바위에 붙은 미역이라도 긁어올게"라고 했던 말처럼 '일단 뭐라도 하고 있는 그 준비'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거죠.
08 . 비슷한 얘기를 김은희 작가님께서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영화나 드라마도 재밌게 보는데 딱 하나 공감을 못하는 장면이 있어요. 극 중에 작가 역할로 나오는 배우들은 다 노트북을 열자마자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거든요. 근데 저는 글 쓰는 시간의 90%는 빈 화면을 보고 멍 때리는 시간들이에요. 그냥 빈 화면 켜놓고 야구도 봤다가 설거지도 했다가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시그널도 쓰고, 킹덤도 썼어요. 어떻게 썼냐고 물으면 '생활하는 중에 썼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09 . 김은희 작가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는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얀 도화지와의 조우를 겁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겁내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그냥 생활 속에 아주 당연한 일부처럼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늘 내 생활 속, 내 생각 속의 무언가를 받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이 백지 녀석에게 '오늘은 어떤 먹이를 줘볼까?'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더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거죠.
10 . 코어 타임이라는 것도 유용하고, 할 때 딱 집중해서 하고 놀 때는 확실하게 논다는 것도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잘할 수 있다면 매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일과 마주할 때는 그냥 의도적으로 흰 바탕화면을 열어놓고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노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뮤즈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뮤즈를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 뮤즈가 몇 시에 네 방을 찾아가면 되는지부터 알려줘라'라는 작가 스티븐 킹의 말처럼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노력은 이 지루한 흰색 도화지를 앞에 두고서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여러분도 때로는 일단 뭔가를 펼쳐놓고 그 안에 담을 먹잇감을 찾는 심정으로 하루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도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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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 오후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