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기자의 사람이니까 경영이다]꼰대의 조건:도덕적 후진성, 그때는 맞아도 지금은 틀리다 - 매일경제
매일경제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자, 그 판단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자, 그의 이름은 바로 ‘꼰대’다.
꼰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려면 상대의 의지를 누를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 권력이야말로 꼰대 짓의 원천이다.
꼰대는 속성상 ‘대화’를 거부한다. 대화는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생각을 풀어놓으며 서로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너와 나는 함께 성장함다. 그러나 꼰대는 그 같은 ‘대화’가 싫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고만 한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상대가 도덕적,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꼰대 짓을 해도 괜찮았다. 그게 잘못되고 틀린 행동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충고하는 건 옳은 일이었다. 아랫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경청하는 흉내라도 내야 했다. 그게 예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르장머리 없다’라는 비판을 듣기 일쑤였다.
과거에는 한국 조직의 운영 방식이 꼰대 짓에 기반하고 있었다. 꼰대 짓을 하는 조직이 그렇지 않은 조직보다 경쟁에서 유리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세상에 없던 뭔가를 새로 개발하고 창조할 필요가 없던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외국의 선진 제품과 서비스를 빠르게 모방하는 ‘속도’가 중요했다. 이른바 Fast Follower 전략이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윗사람은 결정하고, 아랫사람은 실행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아랫사람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윗사람이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모방과 실행의 속도를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꼰대 짓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당시에는 효과적인 리더십으로 인정받곤 했다.
아랫사람들도 별 불만이 없었다. 당시 한국 조직은 연공서열식 사다리 형태의 계층제였다. 연공이 쌓이면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다. 아랫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할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흐르면 윗사람들이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인 계약이 조직 내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계약을 받아들이며 회사생활을 묵묵히 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기업과 기업 사이에 이직의 벽이 높았다. 한 직장에서 10년, 20년, 30년을 근무하던 게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그 계약을 받아들이는 거 외엔 별다른 수가 없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꼰대 짓’을 비하할 이유가 없었다. 높은 사람은 꼰대 짓을 하고, 낮은 사람은 그 꼰대 짓을 수용하며 살았다. 그런 식으로 기업과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됐다. 사람들은 그 방식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생각도 변한다.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결정하는 법이다. 지금 시대는 권위와 지위에 기대어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행동에 ‘꼰대 짓’이라는 경멸의 이름을 붙였다. 생각의 강요는 도덕적으로 틀린 행동임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창조와 혁신을 요구한다. 선진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모방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업마다 신규 사업 프로젝트를 잇달아 가동한다. 그중 소수만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10개 중 8개는 실패하고 2개만 혁신을 이뤄내도 성공이라고 믿는다.
꼰대 짓은 창조와 혁신에는 ‘독’이고 ‘적’이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 생각을 아랫 사람에게 강요하는 문화에서는 창조적인 생각이 나올 수가 없다. 혁신은 기존 관습에 도전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남들 보기에는 이상해도 호기심을 보이는 조직에서 창조가 나온다. 하지만 꼰대 문화가 배어 있는 곳에서는 그런 ‘이상한 생각’이 자리 잡을 수가 없다. 기존 관습에 젖은 윗사람이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만 나올 뿐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 역시 꼰대를 추방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모두가 연결돼 있다. 조직에서 누가 무슨 짓을 하는지 실시간으로 중계되곤 한다. 경멸의 대상인 꼰대 짓을 하는 상사가 있다고 해보자. 그의 행동은 삽시간에 다수에게 알려진다. 그의 평판은 훼손된다.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이 같은 시대 변화에 가장 손해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지금 부장급들일 것이다. 그들은 하급 직원일 때 긴 시간 상사의 꼰대 짓을 수용해 왔다.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안 했다. 오히려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그들이 부장이 되어, 권위와 지위에서 오는 혜택을 누리려고 하는 찰나, 자신의 생각대로 부하 직원들을 움직이려고 하는 찰나, 세상은 변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간부들에게는 ‘꼰대’라는 경멸적 이름이 붙어졌다.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적자생존이라고 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생존한다. 시대가 변하면, 그에 걸맞게 가치관도 변하고 도덕도 달라진다.
만약 지금 당신이 여전히 꼰대로 살고 있다면, 구시대의 가치관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셈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당신은 아주 후진 도덕관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게 꼰대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이다.
문득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기억이 난다. 그는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내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나요, 선생?(When the facts change, I change my mind. What do you do, sir?)”
당신을 둘러싼 사실이 바뀌었다. 후진 도덕관을 시대의 필요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바뀐 세상에 적응해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미 회원이신가요?
2024년 12월 8일 오전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