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어진 '문제'를 속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
01. 저는 '회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그 문제를 잘 해결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 하나(혹은 여러 개)의 문제를 놓고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이 꽤 매력적인 그림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02. 보통 회사에선 탑다운이든 그 반대든 간에 여러 방향에서 문제 발생을 공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결 방법을 찾기 전에 문제를 정의하라'는 말을 오랜 시간 들어왔죠.
03. 하지만 이런 중요성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사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쉬운 일 만은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제를 솔직하게 정의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죠. 사실 자기가 쥐고 있는 카드로 해결 가능한 것만을 다룬다면 일은 훨씬 쉬우니까요.
04. 저는 적어도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개인 창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문제를 정의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실까 봐 부가 설명을 좀 하자면 이렇습니다. 해결 방법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중심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기반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래도 좀 다행인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결 방법을 적용하고 싶어서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문제를 이기적으로 정의해버리면 안 됩니다. 만들 줄 아는 반찬이 김치밖에 없다고 해서, 김치가 만병통치약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고 방향이 있으니까요.
05. 단기 프로젝트를 많이 하는 조직은 이런 경향이 훨씬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소위 크리에이티브를 다룬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정말 자주 보거든요. 차라리 '문제를 이렇게 정의해 봤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이겁니다'라고 솔직히 말해주면 훨씬 반갑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잘하는 걸 지원해 주고 못하는 걸 해결하는 데 집중하면 되니까요.
06. 그런데 스스로를 속여가며 문제를 비정상적으로 정의하다 보면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다 같이 정신승리만 하는 상태로 프로젝트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프로젝트를 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서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럴싸하게 (심지어 없는) 문제를 만들어서 그럴싸하게 해결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07. 과거에 주목받던 세계 국제 광고제들이 갈수록 시들시들해지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각자가 자신들이 원하는 크리에이티브를 바탕으로 소위 Problem을 멋대로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기발한 창작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를 해결해 준 사례는 가뭄에 콩 나듯 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자신들의 결과물에 Problem-Solution 이라는 말을 쓰려면 문제를 솔직하게 정의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진실되게 오픈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08. 혹시 여러분도 이번 주 회사에서 작성 중인 문서에 '그래서 지금 저희의 문제점은~', '그리고 이에 따른 해결 방안은~'이라는 워딩을 쓰고 계시진 않나요? 그럼 적어도 그 워딩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잘 정의하고 '해결법'을 잘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명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