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타임즈는 “나는 틀렸었다(I was wrong)”라는 시리즈를 발표했습니다. 폴 크루그먼, 미셸 골드버그 등의 필자들이 과거에 자신이 썼던 주장, 예측에 대해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며 왜 틀렸는지 짚어보는 칼럼들인데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들의 고백을 읽으면서 이 전문가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더 신뢰가 갔습니다. 실제 독자 댓글 중에서도 “용기있게 오류를 밝혀주어서 고맙습니다”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한편 이런 기획이 ‘독특해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전문가들이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 밝힌 경우가 극소수라는 것이기도 하죠. 이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권위에 취해 새로운 정보를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고, 오류를 수정해가는 데는 외부자의 시선, 즉 ‘뭘 모르는’ 초보의 질문을 성실히 주고 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혹시 회의나 수업시간 등에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너무 바보같은 질문이면 어쩌지?’ ‘괜히 이런 질문을 해서 안그래도 멍청한데 더 멍청해보이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며 혼자 주눅들고 얼굴이 빨개지곤 했습니다. 특히 제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닌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꼭 ‘뭘 모르는’ 질문이 항상 ‘바보같은’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때론 ‘뭘 모르는’ 상태에서 던지는 질문이 핵심을 찌를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의 상황일텐데요. ‘뭘 모르는’ 아이가 던진 질문(“와! 임금님은 왜 벌거벗었어요?”) 하나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권위를 흔들리게 했습니다. 행렬에 참가했던 국민들은 아이의 말 한마디에 막힌 속이 싹 뚫린듯한 표정을 지었고요. 역시 만약 아이가 ‘뭘 좀 아는’ 상태였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속 신하들은 ‘뭘 좀 아는’ 사람들이고, 아이는 ‘뭘 모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화 속 신하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임금님 너무 멋져요!’라고 외치거나 ‘임금님의 옷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자자하게 하는데요. 그들에겐 ‘어른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는 편이 그들에겐 이득입니다. 어차피 지적해봤자 고쳐지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러다보면 벌거벗었다는 사실이 의식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반면 아이는 ‘뭘 모르는 외부자’입니다. ‘뭘 모르기’ 때문에 한발짝 떨어져서 그 분야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질문이야말로, 전문가들만 모여 있을 경우 알아채기 어려운 문제를 꿰뚫을 수 있는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야에 힘껏 몰입하다보면 간혹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바깥 생각을 잘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강연을 엮어놓은 책 <배움엔 끝이 없다>에는 어떤 ‘뭘 모르는’ 경제학과 학생의 질문이 불쑥 등장합니다. “불문학을 왜 배워야 합니까?” 불문학 교수에게 불문학을 왜 배워야하냐는 질문을 한다는 건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입니다. 저 질문의 행간에는 분명히 ‘왜 그런 돈도 안되고 쓸모도 없는 것을 해야하냐’는 말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굉장히 화를 내거나 가까스로 인자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우치다 선생은 ‘무례하다’며 버럭 성을 내거나 ‘그냥 외워’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뭘 모르는’ 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굉장히 길고 진지하게 논증, 설명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경제학은 ‘현실의 것’ ‘명확한 것’을 다루고 불문학은 ‘비현실’ ‘애매한 것’을 다룬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경제학 역시 사람들의 관념 위에 세워진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유사하다. 또한 사람의 경제 활동 역시 이성적인 판단 보다 충동에 이끌리는 부분이 훨씬 크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이 줄 수 있는 영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포용력과 기백에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한 것은 학생의 질문에 담긴 생각에 우치다 선생이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간단한 질문 조차 답변하지 못하면, 이 업계(학계)는 대중을 설득하고 미래의 후학, 팬, 소비자를 양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실력 좋은 사람들끼리 공을 굴리는 것은 호쾌합니다. 눈만 찡긋 해도 척입니다. 반면 뭘 모르는 애들이 자꾸 기웃거리면서 떠들어대며 축구공으로 농구를 하고 있으면 복장터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뉴비’들을 진심으로 섭외하지 않으면 이 업계는 ‘고인물’로만 가득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덕후판에도 마이너의 끝을 달리는 ‘마니아’가 있는가 하면, ‘머글(일반인)’들에게 끊임없이 ‘츄라이 츄라이’를 외치는 ‘영업러’도 있습니다. 뉴비는 눈치가 없고 귀찮게 굽니다. 하지만 뉴비가 유입되지 않으면 그 장르는 망합니다. 결국 한명의 ‘뉴비’를 끌어들이는 것은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오래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일입니다. 미국의 어떤 코미디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나는 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봤자 생판 초짜인 ‘문외한’들에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대중의 안목을 탓할 거예요? 웃기지 않는 코미디는 아무런 의미가 없죠. 웃기지 않은 코미디를 할거면 무대가 아닌 강의실으로 가야합니다.” ‘뭘 모르는’ 초보의 질문에 성실히 소통하는 것은 결국 안팎을 나누는 ‘경계’를 허물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 그리고 결국 그 분야를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전문가들이 쉬운 설명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나의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은 탐구도 중요합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말 걸기들도 필요합니다. 입구에 모여든, 뭘 모르는(하지만 알고 싶은 호기심에 모여든) 문외한들의 웅성거림과 어설픔이야말로 어떤 분야를 ‘흥’하게 만드는 주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뭘 모르는' 초보의 질문은 쓸모없는 것일까?[인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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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9일 오후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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