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와 주식투자

1999년 겨울,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저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곳은 당구장. 고등학교 때 당구도 많이 치고 했으니 자연스럽게 당구장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시급 2,000원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침 8시 출근, 오후 3시 퇴근이었는데 저는 오후 11시까지 놀면서 일을 돕다가 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당구장 지배인 형과 함께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웠거든요. 쉬지 않고 한 달을 꼬박 일하면 42만 원을 받았습니다. 첫 월급 42만 원을 받고 돈 벌기 참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나, 하루에 15시간씩 일하면서. '이렇게 큰돈을 놀면서 버네?' 저는 신이 나서 어머니와 누나에게 용돈도 드리며 스스로를 대견해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참.. 어릴 때부터 계산도 잘 못하고 미련하게 살았네요. 그래도 이런 미련함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당구장 가족들은 모두 저를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저는 이후로도 4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씩 계속 부름을 받아 용돈 벌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미련했던 저와 그때 당구장. 2004년 4월. 당구장에 일하러 처음 들어갔을 때 제 당구 실력은 150이었습니다. 저는 당구 수치를 어떻게 정하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친구들이 이제 좀 올리라고 하면 올리는 식으로 엉성하게 수치를 정했습니다. 어느 날 지배인 형이 얘기해줬습니다. "네가 지금 까지 당구 치면서 한 큐에 가장 많이 친 개수가 네 실력이다." 즉, 하이런을 당구 수로 정하면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하이런이 15개라면 150 30개라면 300. 저는 좀 이상했습니다. "아니, 30분 만에 자기 당구수를 다 뺀다던가 평균적으로 얼마를 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계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이런은 운이 좋아서 한 번 크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게 그거다." 잘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존경하던 형이었으니깐. 저는 한 큐에 많이 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수들이 모아치기를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혼자 꾸준히 연습했고 결국 30개까지 쳤습니다. 저는 형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한 큐에 30개는 운이 좀 따라준다고 칠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어느덧 게임 중에도 쉬운 공이 걸리면 한 큐에 10개 정도는 안정적으로 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평균값도 당연히 덩달아 향상되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친구들의 당구 실력이 너무 시시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뭔가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즘 가끔 저는 형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주식하면서 한 종목에 가장 많이 올린 수익률이 네 실력이다." 저는 주식투자를 2004년도에 처음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당구장에서 모은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 10주를 420만 원에 샀던 게 제 첫 투자였습니다. 60만 원쯤 하던 주식이 42만 원까지 떨어지자 이걸 잘 잡아서는 한두어 달 가지고 있다가 팔았던 것 같습니다. 수익률이 5% 정도나 되었으려나요? 증권 앱에 들어가 보니 지금은 그때 그 계좌가 없어진 건지 기록이 없어진 건지 찾을 수가 없네요. 이후로도 제 투자방식은 비슷했습니다. 2008년도 겨울에 주가가 팍 떨어졌을 때 잠깐 사서 팔고 2011년도 여름에 팍 떨어졌을 때 잠깐 사서 팔고 2015년도에 브렉시트인지 뭔지 또 팍 떨어졌을 때 잠깐 사서 팔고 제 개별 종목 최고 수익률은 20%를 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천금 같은 시기들에 모두 주식을 샀는데도요. 물론 돈도 거의 벌지 못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고 저는 회사의 시총도 모르고 주식을 사곤 했습니다. 뭔가 잘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저는 2018년이 되어서야 그런 친구를 만났고 주식투자를 진지하게 배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5%, 10% 수익만 나도 빨리 팔고 싶다는 마음을 못 이기고 툭툭 팔아버렸는데, 투자란 바로 그런 마음과 싸워서 이겨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책들을 읽고, 좋은 유튜브들을 보면서 저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제 하이런이 계속 새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지금까지의 개별 종목 최고 수익률은 250%입니다. 세 배가 조금 넘었을 때 못 참고 팔아버렸네요. 사실 비상장 회사의 주식까지 따지면 250% 보다 훨씬 높지만, 그건 팔 수 없어서 못 팔고 기다린 거지 제 의지와는 상관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치고 싶지 않네요. 당구에서 하이런 30개 기록을 치고 나면 10개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칠 수 있듯이, 최고 수익률 250% 정도를 경험하면 6,70%쯤은 이제 대수롭지 않습니다. 빨리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올라서 제 하이런인 250%에 가까워 가는 종목이 또 생긴다면 분명히 또 이런 감정이 몰아칠 겁니다. '아 견디기 힘들다. 너무 팔고 싶다. 이 정도에서 그냥 실현하자.' 높은 수익률을 한 번 경험해 보는 것은 이래서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당구에서의 하이런처럼, 최고 수익률이 투자 실력을 나타내 주는 단순하면서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럼 최고 수준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수익률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피터 린치는 25루타 정도면 전문 투자자들도 인생에서 잘 경험해보기 힘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는 10루타 정도의 경험이면 아주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팔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10루타 주식들을 손에 쥐었다가 놓쳐버린 적이 많네요. 미래의 어느 날 제가 10루타를 경험하게 되면 아무도 없는 당구장에서 홀로 연습해가며 공 30개를 한 큐에 쳤던 날의 기분을 느낄 것 같습니다. 좋아서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가슴 속에서 고요하고 잔잔하게 올라오는 기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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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1일 오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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