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으로 돌아가라는 삶의 명령

‘이거, 완전 대학 동아리잖아?’ 스타트업계에 처음 들어오고나서 들었던 감상입니다. 대학시절, 영어잡지를 창간했고 이를 포함해 3개의 동아리 창립에 기여했습니다. 영어토론 연합동아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습니다. 디베이트계를 다루는 인터뷰 콘텐츠, 잡지, 토론가이드 등을 발행했었죠. 되돌아보면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그것도 ‘미디어’와 관련된 일에 관심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대학 동아리같다’라는 말은 비판이 아닌 칭찬에 가까웠습니다. 제도화되지 않은 삶의 영역, 규칙과 보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인간의 열과 성이 남아있는 무정부상태(anarchy), 문제가 고착화된 것이 아닌, 새롭게 구성하고 연성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곳. 인간 삶의 많은 영역이 제도화, 계층화, 합리화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생활’이겠죠. 나이와 젠더 계급주의의 에테르로 꽉 채워져 있고, 과거의 규칙과 조직의 합리성이 주요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하나의 부품이 되고 넥타이에 매여, 정장의 뒤에 숨어 JD를 적당히 수행하다 국밥먹고 은퇴하는 곳. 근본적인 의구심이 있습니다. 제도화, 합리화, 루틴화, 권위화된 삶의 영역에서 인간은 성장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가 이미 만들어놓은 규칙을 따르다 죽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창조하며 위대함을 체현하는 존재일텐데요. 내 미션을 내가 정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날것으로 돌아가라’는 삶의 명령이 들립니다. 스타트업에 끌리는 이유는 이거겠죠. 직무에 대해서도 ‘날것의 관점’을 장착하면 일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방법론, 직무 명칭, 가이드 등이 빠르게 번역되는 곳이 스타트업인데요, ‘스타트업 선진국’에서 실행가들이 만든 프레임워크, 명칭, 방법론도 결국 누군가가 ‘날것의 삶’에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잖아요? 그걸 학원다니듯 열심히 공부하는 접근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타트업에 다니다보니 ‘영업’과 비슷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도 콜드메일을 보내서 협업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날것’의 수준에서 벗어나 ‘영업’이라는 직무에 대한 인사이트를 뽑아낼 수준은 아닙니다만, 실행하다보니 결국 이 일을 전문화, 고도화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가치제안’과 ‘공명하는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브랜드가 해결하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와 가치에 집중하는 접근법이, ‘계약적인’ 접근법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비즈니스를 함께 하려면 계산이 맞아야 하지만, 계산을 맞춰보려면 일단 말이 통해야한다고나 할까요. 결국 직무라는 것은 제도화되기 이전의 ‘날것’의 인간 활동이 비즈니스적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제도화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원래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사람 모아서 모임하고, 판 크게 벌이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운영도 커뮤니티 매니징도 잘하겠죠. 원래 세상을 디자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주말에 전시회 다니는 사람이 디자인도 잘할겁니다. ‘직무’를 학원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에 근본적인 미스매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날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전문화 고도화로 이어질 수 있는 반면, 학원식으로 ‘제도화된 방법론’을 달달 외우는 사람은 ‘날것’에 다다르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죠. 커리어도 동일한 것 같아요. 큰 회사에서 고도화, 전문화된 일을 하는 분들도 물론 시장에 필요하겠지만, 아직 ‘날것’의 영역에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품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더 필요할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날것’의 전문가들이 더 빠른 성장의 기회를 얻을수도 있습니다. 이미 전문화, 고도화된 곳에서는 고점을 찍으면 하강만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멋들어진 방법론이나 프레임워크 사실 저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도구와 목적이 뒤바뀌기 쉽기 때문에, 항상 본질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본질은 문제 해결을 통해 ‘날것’의 영역에 있는 경험을 제품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이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삶을 ‘날것’처럼 살고, 주도적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며, 공감하는 문제에는 이기심을 잊고 파고드는 사람들이라는 것. ‘날것으로 돌아가라’는 삶의 명령을 듣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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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0일 오전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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