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뭐가 행복이고, 뭐가 불행인지를 잘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아버렸다. 이것도 다행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모호해지니, 그것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어쩐지 인생은 갈수록 어렵다. 배우면 배울수록 숙제만 많아지는 느낌이다. 장자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 삶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 배우고 싶지 않아도 배워야 하는 게 삶이자 인생이다. 그러하기에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이며, 그 한 끗 차이가 삶의 크고 작은 좌충우돌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것에 웃고 울고를 반복하고, 사람에게 기대다가도 등을 돌려 후려침을 당하기도 한다. 누군가 기댈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이고, 누군가에게 버림 당했다는 건 불행일까? 단편적으로 보면 그 이분법은 딱 들어맞지만, 삶을 길게 놓고 봤을 때 그것은 그리 간단히 나눌 성질의 것이 아니다. ‘행복’의 ‘행’자는 ‘다행’이라는 말이고, ‘다행’은 ‘다행한 일이 많다’는 뜻이다. 돌이켜보 다행인 일들은 좋고 나쁨의 판단에서 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선 독이 되고, 독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 다행인 것들이 많다. 그래서 삶은 쉽지 않은 것이며, 하늘에 ‘다행’을 구걸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비참함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어리고 젊을 땐 행복만을 바랐다. 무탈하고 다행인 삶을 추구하였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이자 목적인 줄만 알았다.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을 위해서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행복’은 일종의 감정이자 어떤 상태다. 감정과 상태가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다. 문득, 중년이 되었다. 깨달음이 문득 온 것도 그즈음이다. 모든 걸 거부하고 아무것에나 대항하던 나이가 젊음과 노년의 그 어느 중간에 걸쳤다는 걸 느낀 순간. 삶을 다 알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새하얀 속살을 가진 것도 아니고, 패기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것을 감쌀 수 있는 포용의 힘이 있는 지금 이 순간. 아직 마음의 불씨는 남아 있지만, 그것이 세상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내 마음의 지경을 밝히려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중년은 애매하다. ‘중년’의 ‘중’자는 가운데를 뜻하고, 경계에 서성이는 존재는 그렇게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애매함을 이제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경계에 서 있는 존재는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고,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나는 삶에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을 ’행복‘과 ‘불행’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럴 깜냥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게만 있진 않는다. 동시에,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것들을 사력을 다해 내게 맞는 의미로 재건하기도 한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을 나누고 논하는 것은 부질 없다. 다행이라 느끼며 게을러지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여겨 다시 일어나는 삶은 이미 나에게 수많은 역설을 안겨 주었다. 행복은 이내 불안함을 유발한다. 불행은 이내 다시 일어날 오기를 안겨 준다. 무탈을 바라면 탈을 얻게 되고, 탈에 맞서면 무탈함을 얻는다.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가. ‘다행스러운 삶’은 우리에게 있어 무슨 의미일까. 분명 다행인 건, 이제 나는 ‘행복’과 ‘불행’을 간단히 나누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웃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내게 슬픈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오만을 조금만 걷어내면, 어쩌면 삶은 조금은 다른 힌트를 보여줄지 모른다. 물론 그것을 다 알고 싶진 않다. 어차피 그것을 다 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닐테니. 그저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그것들을 마주하며 나만의 중심을 잡아가려 한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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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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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0일 오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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