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완전히 다시 정의할 때가 왔다

문인과 학자들의 죄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오랜시간동안 글쓰기는 그들의 것으로, 어릴때부터 읽기와 쓰기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정말 소수의 엘리트층의 것으로, ‘심심한 사과’와 ‘북침/남침’을 이해하는 특정 계층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글쓰기’라는 산업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글쓰기’를 완전히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매우 소박한(응?) 주장을 펴볼까 합니다. 조금 많이 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글이 안전한 글보다 훨씬 더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의하진 않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고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태초에 종이값이 비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권력은 지식과 동맹을 맺고 종교, 역사, 신화, 기록을 통제했고, 인간의 머리를 떠도는 수많은 상념과 말로 내뱉어지는 수많은 이야기 중 잉크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이 선택한 것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공동체가 종이매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출판자본주의가 공동체라는 관념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들이 하나의 공동체이며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관념은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만들기’는 매우 비용이 높은 행위이며, 특히 이를 구술로 유지하는데는 오랜 시간과 높은 비용이 듭니다. 어떤 학자는 책에서 ‘우리’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해 공동체가 상상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정치적 공동체가 생겨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잉크의 힘은 강력했고, 모든 생각이 글로 쓰여질 수는 없었습니다. 디지털 매체가 나오기 전까지 인쇄문화는 따라서 근본적으로 생각 시장의 중간상인들이 무엇이 글로 쓰여지는지 ‘게이트키핑’을 하는 방식으로 통제되었습니다. 출판사는 어떤 책이 출판될지를 결정합니다. 매체는 누구의 어떤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 지면위에 올려질지 통제합니다. 문학상이나 문학 출판사는 누구의 작품이 주목을 받을지, 누가 ‘글을 써서 먹고 살아도 되는 자’인지 게이트키핑해왔죠. 종이 지면은 그 물성 때문에 ‘유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산업구조가 아닌가 합니다. 구조상 모든 이야기를 다 출판할 수는 없습니다. 베어 넘길 수 있는 나무에는 한계가 있고, 유통할 수 있는 신문이나 책의 양에도 물질적인 제한이 걸리며, 모든 글을 다 편집하고 선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글은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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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오전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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