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가끔 제게 이렇게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도영님은 최종 꿈이 뭐예요?', '도영님은 나중에 자기 브랜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가요?', '도영님은 사업해 보고 싶진 않으세요?'
가만히 돌이켜보니 저는 한 번도 그런 질문에 뾰족하게 답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정확하게는 그제서야 그 질문을 제게 던져보는 것 같습니다. '최종 꿈? 나만의 브랜드? 사업?'
02.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질문을 많이 듣게 되자 그제서야 저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저렇게 '최종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살아온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죠.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굳이 최종 목표를 설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최종 목표는 막연한 꿈이나 이상향과는 달라서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부여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인데 그걸 꼭 지금 고민하고 확정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서였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정한 방향대로 한걸음 한걸음 정확하게 걸어나갈 수 있냐 하는 의구심이 컸습니다.
03. 다른 하나는 우연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극 J의 성향이라 뭐든 계획을 세우고 정해진 루트대로 가는 것이 매우 마음 편한 성격입니다. 심지어 여행을 갈 때도 잘 준비해서 짜여진 대로 착착 움직이는 게 즐겁고 행복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살면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우연들이 스트레스로 작용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제멋대로의 생각이지만 '쿨한 J는 계획을 수정할 수 있을 정도의 맘의 여유는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게 또 사견이거든요.
04. 그러니 저처럼 계획을 세우고 따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떤 큰 목표가 이런 의외의 가능성들을 막아버리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목표가 너무 원대하고,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당연히 그동안 우리도 여러 모습으로 바뀌고 성장할 테니까요.
'과거의 나도 타인이다'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처럼, 만약 최종 목표에 겨우겨우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를 처음 설정했던 나 자신은 마치 타인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05. 그래서 저는 Final Goal을 만드는 것보다 Next Goal을 잘 설정하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목표를 만든 다음 그걸 이루기 위해서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역산해서 내려오는 방식보다 지금 내가 다음 단계로 쌓아 올려야 하는 블록을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는 멀리 보지 않고 눈앞의 것에만 급급하면 안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Next Stage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경험들을 했었습니다.
06. 제가 진짜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일단(一旦)'입니다. 네. 우리가 흔히 '일단 해보자'라고 말할 때 쓰는 그 '일단'이 맞습니다.
가끔 이 단어가 '그냥'이라는 의미와 혼동되어 마치 'Just Do It'의 늬앙스를 풍길 때가 있지만 사실 '일단'이란 말에는 반전의 해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의 '단'자가 층계 '단(段)'자나 짧을 '단(短)'자를 쓸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의 한자는 '한 일(一)'자에 '아침 단(旦)'자를 씁니다. 다시 말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서 한다'가 일단의 진짜 의미입니다.
07. 그러니 적어도 저에게 '일단 해보자'라는 뜻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부딪혀보자'가 아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먼저, 가장 손쉽게 해볼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하자'가 될 겁니다. 저는 이게 저 자신을 움직이는 좋은 원동력이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잘 버티게 해준 버팀목이 되어줬다고도 생각하고요)
08. 때문에 Final Goal을 설정하고서 한 단계씩 내려와 지금의 나를 바라보기보다는 '일단' 눈앞의 한 단계를 쌓아 올라간 다음 거기서부터 또 다음을 설정하는 방식이 부담도 적고 성취감도 높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꼭 이루고 싶은 최종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지만 그런 건 '달성'과 '실패'로 구분되는 것 대신 '추구'와 '비추구(?)' 정도로 가늠할 수 있는 것들로 꾸리는 게 낫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봅니다.
09. 한 달 사이 이런 말을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는 친구는 (포인트는 아직 시작 안 했다는 겁니다 이 친구..) 본인은 운동선수 같은 근육은 싫으니 아이돌같이 예쁜 근육을 만들고 싶다고 했고, 온라인 영어 교육 과정을 고민 중이라는 친구는 미국식 영어보다 영국식 영어를 익히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으신가요? '일단 해보면서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해보면 생각이 달라지고, 하다 보면 원하는 게 또 새롭게 생길 수 있다고 말이죠.
10. 그러니 저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나중에 이런이런 거 이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라는 질문 대신 '올해 꼭 해보고 싶으신 게 있나요?', '이다음으로는 또 뭐에 도전해 보고 싶으세요?' 같은 질문 말입니다. 그럼 미래의 저를 설정한 다음 시간을 거슬러 현재에 이르는 방법보다 지금의 저를 가장 가까이 있는 미래로 보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