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자타공인 게임 대국입니다. WCG(World Cyber Games) 성적을 바탕으로 한 국가별 게임 실력 지도에서 한국은 ‘신의 영역’으로 분류됩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스타크래프트, LOL, 오버워치 등 각종 e-sports 대회의 우승을 차지하고 상금을 싹쓸이 하는가 하면, 유수의 게임회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출시한 작품을 몇 시간도 안 되어 클리어 해버리는 등 게임세계에서 한국인들의 위엄은 말그대로 ㅎㄷㄷ한데요.
이쯤에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게임을 잘할까요? ‘왜 한국인은…(why Korean)’으로 시작하는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의 첫머리에 game이 있을만큼, 한국인과 게임은 세계인들이 궁금해하는 주제이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게임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상금랭킹이 높다는 기사에는 어김없이 “얼마나 하고 놀 게 없으면 게임만 그렇게 한다”는 식의 댓글이 베플이 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국인들은 하고 놀 게 없어서 그렇다”는 말에 동의하기 어려운 게, 이런 인식이 게임 말고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화가 천만이 넘었다는 소식에도 ‘한국 사람들은 하고 놀 게 없어서 영화만 그렇게 본다’. 주말 산이 등산객으로 가득찬다는 소식에도 ‘한국 사람들은 하고 놀 게 없어서 산만 그렇게 간다‘. 프로야구 관객이 몇백만 명이 넘었다는 소식에도 ’한국 사람들은 하고 놀 게 없어서 야구장만 그렇게 간다‘.
하고 놀 게 없다구요? 게임도 하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야구도 보러 가는데 말입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하고 놀 게 많은 거 아닌가요? 그러니 “하고 놀 게 없어서 게임만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왜 게임을 하십니까? 게임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게임을 잘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하고 싶으니까 잘 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 문제는 간단합니다. 한국인들은 게임을 왜 잘할까? 라는 질문을 “한국인들은 왜 게임을 잘하고 싶을까?”로 바꾸면 됩니다.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욕구로 초점을 바꾸는 것이죠. 이것이 문화심리학적인 사고입니다.
서두가 다소 길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게임을 잘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사람들은 재미있어서 게임을 합니다. 게임에는 많은 재미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그래픽,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라인, 주어진 과제를 수행했을 때 받게 되는 보상 등등.
그러나 게임의 재미에는 이러한 게임 자체의 요소 이외에 다른 것들이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이유와 맥락은 저마다, 그리고 문화마다 다른데요. 게임을 하는 이유 중,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여럿이 어울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피씨방은 혼자도 가지만 대개 친구들과 어울려 갑니다. 친구들과 같이 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같은 게임 안에서 친한 유저들끼리 시간을 정해서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혼자 게임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한 게임에 많은 유저가 동시에 접속하여 서로의 역할을 하는 방식의 게임을 MMORPG(멀티 유저 다중 접속 롤플레잉 게임)이라고 합니다. 스타크래프트, LOL, 오버워치, 배틀 그라운드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죠. 게임 안에서 직업을 갖고 물건을 사고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사기를 치고 싸우고 동맹을 맺고 전쟁을 합니다.
한국인들은 특히 MMORPG를 선호하는 편인데요. 다른 사람들과의 다채로운 상호작용에 열려 있는 한국인의 성향이 반영된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 덕분에, 여럿이 팀을 이루어 플레이하는 게임에서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나는 것 아닐까요?
한국인들이 게임을 잘 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2️⃣‘지기 싫어서’ 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입니다. 지기 싫으니까 잘 하게 될 수밖에 없죠.
문화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주체성 자기’가 우세합니다. 주체성 자기가 강한 사람은 본인을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중심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타인을 이끌고 가르치고 관리하려는 욕구가 큰데요.
‘이긴다’는 것은 본인의 영향력을 타인에게 미치는 일들 중에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반대로 ‘진다’는 것은 본인의 영향력이 가장 미미하다는 의미겠죠. 한국인들은 누군가에게 이기고 싶은, 그리고 지고 싶지 않은 욕구가 강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뭘 하든(예; 씨름) 삼세판, 즉 세 번 겨뤄 두 번을 이겨야 이긴 것으로 쳐 주었는데요. 한 번 승부의 결과로는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한국인들의 심성이 반영된 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이기는 일은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의 나는 한없이 힘없고 약한 사람이기 쉽죠. 상대적으로 게임은 이러한 ‘승리’를 쉽게 경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게임에서의 승리는 상당 부분 나의 순수한 노력의 결과니까요.
이기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잘하게 됐다. 이게 한국인이 게임을 잘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걸 더 확장해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어딘가 '자기가 꽂힌 분야‘와 맞아 떨어진다면, 한국인들은 거기서도 또 기막힌 성취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추가로…한국이 게임을 잘하는 이유로 종종 언급되는 우수한 인프라와 접근성, 선수 육성시스템 등은 이러한 욕구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결과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게임을 더 잘하려다 보니 우수한 장비가 필요했고, 좋은 환경에서 게임을 하다보니 결국 게임 실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