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쫓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 없는 삶꼴을 발전시킨다.”
“산업자본주의와 달리 정보자본주의는 비물질적인 것마저도 상품으로 만든다. 삶 자체가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업화된다. 소셜미디어는 소통을 깡그리 착취한다. 정보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정말이지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정복한다. 인간적 호감은 별점 평가나 ‘좋아요’로 대체된다. 친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수를 세어야 할 대상이다.”
한 철학자의 위와 같은 진단에는 깊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은 경험의 밀도가 낮고, 휘발성이 높은 특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사의 흐름이 없고, 흐름이 뚝뚝 끊기며, 맥락이 없는 정보 원자들이 붕붕 날아다니며, 관계와 소통 역시 휘발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 논의를 잘 따라가다보면, 사실 결국 맥루한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미디어가 메시지다.’ 스크롤할수 있는 관계, 답하지 않아도 되는 메시지, 쓸어내리면 놓쳐버리는 메시지는 깊은 관계를 만들 수 없다. 꼭 읽어야 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고,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 뇌에게 디지털은 그냥 다 붕붕 떠다니고 손가락 하나면 ‘모른척’ ‘안본척’ 할 수 있는 형체없는 휘발성 잉크일 뿐이다.
나도 이런 식의 철학적 논의를 좋아하기도 하고,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한데, 사실 맥루한이든 이 철학자든, 죄송하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를 만나보고 소통해보고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미디어가 메시지’이긴 하지만, ‘메시지도 메시지’다. 말도 안되는 말 같지만, 소통의 양식뿐만 아니라 소통의 내용도 중요하긴 하다. 짧은 글도 정독하는 사람이 있다. 내 글을 실제로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 공간의 연결에 관해 얘기하자면, 사실 서울이라는 로컬이 매우 특수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많은 디지털 인구가 서울/경기권에 머무르고 있기에, 디지털-오프라인 로컬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메시지야 무시하면 되고, 알고리즘의 마법으로 내 피드에 글이 안뜨면 그만이지만, 정주의 영역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의 휘발성을 잡아줄 수 있는, ‘공간의 오오라’와 마법이 있다.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디지털을 뚫고 만남이 성사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만남과 대화가 성사되고 있는데, 참 흥미로운 경험이다. 서로를 스트리밍하다가, 그러니까 스쳐지나가다가 실제로 대면해 대화를 나누게되는 경험. 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맥락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고, 서로 글을 읽어본 적이 있고 메시지에 공감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철학자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소통을 깡그리 착취하고자 하지만, 인간의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는 구조를 뚫고 인연을 만들어낸다. 공간, 그리고 연결 욕구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래서 ‘주의권력’을 가진 자가 앞으로 정말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될 거라는 나의 주장을 아직 굽힐 생각은 없다. ‘주의권력’을 통해 관계를 상품화하는 일에 어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완전히 비즈니스적인 계약관계는 인간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결과 공명의 힘은 강력하다. 미디어가 메시지지만, 공명의 메시지는 미디어를 뚫고 연결과 만남을 성사시킨다. 나는 스크린을 뚫고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자비와 성장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연결된 우리가 혼자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진리를 나는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