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다가 짜릿한 쾌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지요. 크게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때입니다. 몰랐던 분야의 지식과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이런 관점과 모델로 바라볼 수 있다니 같은 순간입니다. 요즘 역사와 투자에 관한 책들을 읽는 중인데요. 낯설지만 흥미로운 새로운 내용들이 많은 자극을 줍니다. 재밌습니다. 세상은 내가 접하고 경험한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큽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집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또 책을 읽게 됩니다.
두 번째는 본래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둥둥 떠다니던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된 글을 만날 때입니다. 선명한 텍스트를 보는 순간 흐릿함이 또렷해집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지만 표현하긴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는 감탄이 나옵니다. 진정한 앎이란 그것을 모르는 타인에게 오롯이 전달되어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과 글이란 도구가 필요합니다.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생각하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지요. 책에서 만나는 이런 순간이 더 소중하고 유니크한 이유입니다. 또, 독서와 글쓰기의 연습이 중요한 이유이고요.
세 번째는 분야와 시대를 뛰어넘어 같은 생각임을 깨닫고 연결할 때입니다. 전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 같은 원리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서로 다른 과학 분야, 서로 다른 산업에서 말입니다. 이런 연결은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때론 이런 연결에 대한 같은 생각과 연결됩니다. 놀랍고 재밌습니다.
2.
'신경 끄기의 기술'은 꽤 오래된 스테디셀러입니다. 제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손이 가지는 않았던 책이었어요.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책의 원제는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입니다. 제목만 봐도 저자의 개성이 물씬 느껴집니다. 물론 제목으로 책의 내용을 유추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책이 어떤 스타일의 구성이나 문체를 갖고 있을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읽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체의 문장은 어렵기도 하고 매끄럽게 읽기가 어렵기도 하니까요. 우연히 이 책을 다룬 책 리뷰 유튜브를 봤습니다. 책이 다루는 내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책을 읽어봤습니다.
3.
이 책은 위의 독서의 즐거움 3가지를 모두 만족합니다. 새로운 조합의 이야기이며, 명확합니다. 비슷한 생각들의 다른 통찰입니다.
고통과 행복, 부정적인 감정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모두 새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모으고, 배치하는 편집 또한 새로움입니다. 창작이며 가치이지요. 성장은 대가를 치릅니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막연히 공감하는 이 전제를 명확한 이야기로 설명하고 정리합니다. 또한 고통을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 정반합과 같은 변증법의 구조, 저자의 경험에서 기반한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야기는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죽음을 보는 관점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필 스터츠의 툴스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생각이 현실이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와 세상, 감정, 타인, 일과 사건, 문제와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이 모든 것을 만듭니다. 우리의 관점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 관점의 중요성을 매우 직설적이고 쉽게 들려줍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기에 나를 성장시키는 고통을 선택해야 합니다. 삶에 확실하게 옳은 건 없습니다. 정답이 아니라 매일매일 조금씩 덜 틀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거절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작은 실행이 동기를 만듭니다.
즐거운 쾌감을 느끼며 읽었습니다. 선입견 때문에 이 책을 늦게 읽게 된 것이 조금은 후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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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 경험에 따르면, 소위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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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 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떠들어 대는 조언 - 긍정과 행복으로 가득 찬 자기 계발 요령 - 은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조언은 개개인이 이미 자신의 결점과 실패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파고들어, 그것에 몰두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고와 최상을 부르짖다 보면, 우리는 반대되는 것들만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어긋나는 것, 내게 없는 것, 내가 이루지 못한 것. 이런 일들만 머릿속으로 무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거울 앞에 서서 ‘난 행복하다’고 되뇌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행복한데 뭐 하러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늘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 현실을 끊임없이 신경 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현실 말이다.
광고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이것저것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소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인 경험이다. 긍정적인 경험을 원하는 건 부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건 긍정적인 것이다. 철학자 앨런 와츠는 이것을 ‘역효과 법칙’이라고 불렀다. 기분을 끌어올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진다. 뭔가를 바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내가 그걸 갖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역효과 법칙을 ‘역효과’ 법칙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경 끄기가 역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긍정 추구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부정 추구는 긍정을 낳는다. 체육관에서 고통을 추구하면, 그 결과로 건강과 활력을 얻는다. 사업을 실패하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를 알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불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뽐낼 수 있다. 힘들더라도 바른말을 하면, 상대의 신뢰와 존중을 얻는다. 공포와 불안을 겪고 나면, 용기와 인내를 얻을 수 있다.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따르는 부정적 경험을 극복해야 한다. 부정을 피하거나 막거나 억누르거나 입막음하려는 시도는 역풍을 불러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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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피엔딩이란 동화에나 나오는 거야
문제없는 삶을 꿈꾸지 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행복에는 투쟁이 따른다. 행복은 문제를 먹고 자란다. 무엇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당신은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 고통 없이 살 수는 없다. 꽃길만 걷을 수도 없다. 쾌락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는 쉬우며, 아마 모두가 비슷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바로 고통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고통을 견디고 싶은가? 이는 무척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며, 당신을 실제로 나아가게 해 주고 사고방식과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나를 나로,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다. 이것이 우리는 규정하고 구분 지으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고통을 이용해 변화를 만든다. 인간은 늘 어느 정도의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진화해왔는데, 그 까닭은 다소 불만과 불안을 느끼는 생명체가 혁신과 생존에 가장 열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진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지지 못한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다. 이런 끊임없는 불만족이 인간이라는 종을 싸우고 분투하며, 번성하고 승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은 인간 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다. 아픔은 어떤 형태든 우리 몸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행동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질색하는 만큼이나 고통은 쓸모 있다.
문제는 끝없이 계속된다. 단지 바뀌거나 나아질 따름이다. 행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해결’이다. 문제를 피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하면 불행해진다. 해결 못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역시 불행해진다. 중요한 건 처음부터 문제 밖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거다. 행복하려면 우리는 뭔가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은 일종의 행동이며 활동이다. 행복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게 아니다. 행복은 끊임없는 제조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품이다. 왜냐면 문제 풀기가 끊임없는 제조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내일의 문제를 풀기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할 문제, 자신이 즐겨 풀 문제를 찾아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감정이 진화한 목적은 딱 하나, 바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잘 살고 더 잘 번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감정은 일종의 ‘피드백 메커니즘’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적합하고 어떤 것이 부적합한지를 알려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부정적 감정은 행동하라는 요구다. 그걸 느끼면 당신은 뭔가를 해야 한다. 반면에 긍정적 감정은 적절한 행동을 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다. 긍정적 감정을 느끼면 삶이 단순해 보이고 그저 삶을 즐기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바로 그 순간에 긍정적 감정이 사라지고 만다. 필연적으로 더 많은 문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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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이 뭔가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자신이 특출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능력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데 집착할 때 나온다. 또 이러한 ‘개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이 전혀 대단하지 않다는 올바른 믿음에서 나온다. 즉, 한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나는 아직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자아 존중감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긍정적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아니라, 부정적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봐야 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미디어의 힘은 굉장하다. 하지만 인간의 주의력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의 물결을 다 처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0과 1의 나열은 수많은 정보 중 0.0001%에 속하는 극히 예외적인 것들뿐이다. 기술과 매스 마케팅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왜곡되었다. 예외적인 것이 범람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더 못났다고 느끼게 됐다. 그리고 주목받거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극단적이고 더 근본적으로 행동하고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사실 ‘나 혼자만의 문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경험하는 문제를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미래에도 겪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또한 그럴 것이다. 당신에게 생긴 문제나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 시늉도 때를 봐가며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란 각자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며,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자의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는 사실상 자승자박이나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신경 끄라는 소리 나 마찬가지다. 당신의 문제는 특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놓아버리면, 크나큰 자유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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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통을 피하는 법은 없어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멋진 몸을 갖고 워커홀릭은 초고속 승진을 하며 고된 연습을 견딘 아티스트는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다. 당신이 선택한 고통이 당신을 만든다.
고통이 불가피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고통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즉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가’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관한 객관적 사실보다, 당신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가치와 기준으로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문제가 생기는 건 필연적이겠지만, 문제의 의미는 필연적이지 않다. 문제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과 평가 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지조차도 잘 모른다.
자기인식의 첫 단계는 자기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인식의 두 번째 층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왜’ 느끼는지를 묻는 능력이다. 감정의 이유를 찾는 이 질문은 몹시 어려우며, 어쩌면 일관되고 정확한 답을 찾는 데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자기인식에는 더 깊은 층이 있다. 눈물로 가득한 이 세 번째 층은 바로 개인의 가치관이다.
나는 다 안다는 식으로 자존감을 세우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통해 뭔가를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들은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에 공감하지 못한다. 더불어 새롭고 중요한 정보를 스스로 차단한다.
인생을 낙천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삶은 때로 엉망진창이라는 게 사실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일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깊어지고 오래가며 감정이 장애를 일으키고 만다. 한결같은 긍정은 일종의 회피일 뿐, 삶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기준을 확립한다면, 삶의 문제는 오히려 우리에게 활력과 자극을 준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써야 더 나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와 나쁜 가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좋은 가치는 1. 현실에 바탕을 두고 2. 사회에 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1. 미신적이고 2. 사회에 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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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택을 했으면 책임도 져야지
명심하라. 외부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이걸 알 건 모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경험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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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넌 틀렸어, 물론 나도 틀렸고
성장은 끝없는 반복 과정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틀린’ 것에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틀린 것에서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것을 알게 되면 약간 덜 틀린 것에서 그보다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가 가설이다. 즉 이런 행동은 좋고 중요하지만 저런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가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동으로 그것을 실험한다. 다시 말해, 그 가치에 따라 행동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과 사고방식이 실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정설이나 이념 따위는 없다. 경험을 통해 각자 옳은 것을 찾아갈 뿐이며, 경험을 통해 얻는 것조차도 어느 정도는 틀릴 것이다.
내가 변화하고 발전하면 답도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난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내 매일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탓에 오히려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이들이 집착하는 건 ‘확실성’이다.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 가치를 의심하거나 놓아버리기가 겁나는 것이다. 확신은 성장의 적이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조차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관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성장할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의 느낌과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확신을 추구하는 자세를 버린 뒤, 스스로 미래를 일구지 않는다면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질문해야 한다. 항상 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우리는 항상 틀리기 때문이다. 틀리면 변화할 수 있다. 틀리면 성장할 수 있다. 여기 묘한 진리가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경험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그 순간에는 모른다는 점이다.
인간의 뇌는 의미를 산출하는 기계다. 우리가 의미라고 이해하는 건 우리 뇌가 2개 이상의 경험을 엮음으로써 생겨난다. 우리의 마음은 쉼 없이 돌아가며 수없이 많은 연상을 쏟아내고, 그 덕에 우리는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다. 내적 경험이건 외적 경험이건 간에, 경험은 예외 없이 마음속에서 연상과 연결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2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뇌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들을 때 자주 착각하며, 쉽게 잊고 오판한다. 둘째,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그 의미에 집착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뇌가 만든 의미 쪽으로 치우쳐 그걸 놓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알고 믿게 되는 것의 대부분이 우리 두뇌의 선천적인 부정확함과 편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 가운데 대부분이 세상을 대표하지 못하는 사건의 소산이거나 완전히 왜곡된 과거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 믿음의 대부분이 틀렸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믿음이 틀렸다. 어떤 믿음은 다른 믿음보다 덜 틀릴 따름이다. 인간의 마음은 오류로 가득한 난장판이다.
제아무리 정직하고 선하다고 해도 사람은 늘 자신과 타인을 속이며 산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두뇌가 정확성이 아니라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두되는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믿음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새로운 정보는 모조리 일단 기존 가치와 결론에 무게를 두고 저울질한다. 그 결과, 두되는 항상 우리가 그 순간에 참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치우친다.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사람들이 성공을 겁내는 이유는 실패를 겁내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내가 믿고 있는 내 모습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가치를 반드시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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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봐
수많은 작은 실패가 모여 발전을 이룬다. 성공의 크기는 얼마나 많이 실패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당신보다 잘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당신보다 그 일에서 더 많은 실패를 맛봤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사람이 당신보다 못하다면, 그건 그가 당신보다 배움의 고통을 덜 경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대중 매체는 엄청난 성공담을 끊임없이 내보내지만, 정작 성공하는 데 필수적인 수천 시간의 단조로운 연습과 지루함은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진짜로 성공하려면, 실패를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실패하지 않겠다는 건 성공하지 않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더 나은 가치는 과정을 지향한다. 정직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준인 타인에게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라는 과제에 완결 같은 건 없다. 이것은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다. 모든 새로운 대화와 새로운 관계가 솔직한 표현을 하기 위한 도전이자 기회다. 이 가치는 일생 동안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이다.
밖에서 보면 답은 간단하다. “닥치고 그냥 해!” 그러나 안에서 보면,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다. 재밌는 점은 오직 당사자만 질문을 어렵게 느끼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전부 쉽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이나 분노, 슬픔을 느끼면, 만사를 제쳐두고 그런 느낌을 마비시키는 데 몰두한다. 이들의 목표는 얼른 좋은 기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수단을 동원하거나, 자신을 속이거나, 엉터리 가치관으로 돌아가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견디는 법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선택한다는 건 새로운 고통을 자신의 삶에 들여오는 것이다. 그 고통을 즐기고 음미하라.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라.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라.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동기가 부여될 경우에만 행동에 전념한다. 그리고 충분한 정신적 자극이 주어질 경우에만 동기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이런 단계가 일종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 정신적 자극 -> 동기 -> 바람직한 행동
위의 3단계 반응이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자극 -> 동기 -> 행동 -> 자극 -> 동기 -> 행동 -> 무한 반복
행동이 정신적 반응과 자극을 일으키고 뒤이어 다른 행동의 동기가 된다. 이 지식을 활용해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 행동 -> 자극 -> 동기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몇 주가 후딱 지나가곤 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내가 일에 지나치게 부담을 느낀 나머지, 해야 할 일을 번번이 미뤄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곧 깨달았다.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일단 뭔가를 하고 나면, 어려운 일이 금세 쉬워 보인다는 사실을.
'뭐라도 해' 원리를 따르면, 실패가 하찮게 느껴진다. 모든 결과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은 그저 행동하는 것이며, 자극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보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실패는 또다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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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절을 어려워하지 마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뭔가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자신을 거기에 제한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에는 수준이 있다. 수준 높은 의미와 즐거움에 닿으려면, 하나의 관계, 기술, 직업에 수십 년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수십 년을 바치려면, 나머지 선택지를 거부해야 한다. 하나의 가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가치들을 거부해야 한다.
요컨대 뭔가에 가치를 두려면, 우리는 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뭔가에 가치를 두려면, 그 외의 것을 거부해야 한다. 즉 X에 가치를 두려면, X가 아닌 것을 거부해야 한다. 거부는 가치관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무엇을 거부하느냐가 우리는 규정한다.
우리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어떤 선택을 하든 덜 만족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모든 선택지에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직관에 완전히 반하는 내 발견은 몰입 안에 자유와 해방이 있다는 것이다. 내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선택해 집중하고 정신 사납게 하는 온갖 대안을 거부함으로써 난 더 많은 기회와 더 좋은 것을 얻었다.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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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국 우린 다 죽어
어떤 것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두려움이나 민망함, 수치심 따위에 굴복할 이유가 없다. 이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짧은 인생 대부분을 고통과 불편함을 피하는 데 써버린 나는 사실상 삶을 피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결국 소멸하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가 덧없고 피상적인 엉터리 가치를 삶에서 싹 없애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죽음을 늘 의식하지 않는다면, 하찮은 것이 중요해 보이고, 중요한 것이 하찮게 보일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유일하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다른 모든 가치와 결정의 방향을 정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물어야 하지만 절대 묻지 않는 모든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이다. 죽음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로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걸 넘어서는 가치를,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통제할 수 있고 혼란한 이 세계에 적합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행복의 뿌리다. 너 자신보다 대단한 것에 신경 써라. 자신이 거대한 영원의 일부임을, 자신의 삶이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생성의 일부를 이루는 과정일 뿐임을 받아들여라.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일부라는 찰나의 느낌이다.
허세는 우리로부터 이것을 앗아간다. 허세의 중력은 모든 주의를 자아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결과 우리는 내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내가 세상의 모든 부당함을 몸소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그 어떤 누구보다 위대해질 바로 그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허세에 빠지면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흥분이 내면으로 향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경험하는 모든 사건에 내 생각과 편견을 반영하게 된다. 이런 느낌은 굉장히 유혹적이고, 여기에 빠져 있으면 한동안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허세는 정신의 독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주목받는 것과 성공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당신은 이미 대단하다. 당신이 대단한 건, 끝없는 혼란과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어디에 신경을 쓰고 어디에 신경을 끌지를 계속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며 나름의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이미 당신을 아름답고 성공적이며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심지어 당신이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다 죽는다. 우리 모두가. 저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에 벌벌 떨고 기죽는다. 아무것도 아닌 게 우리를 먹어 치운단 말이다.
어둠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삶이 밝아지고, 세상이 고요해지며, 어떤 것에 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습관이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