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비계(飛階)'를 걷어내기

01. 건축 용어 중에 '비계(飛階-scaff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사를 할 때 외벽이나 높은 곳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가설물을 뜻하죠. 흔히 건축 중인 건물의 겉면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파이프나 나무 목재 등이 이 '비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건물이 일정한 틀을 갖추고 나면 비계는 모두 제거하게 되죠. 02. 그런데 저는 기획 일을 할 때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기획이란 것도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구조를 설계하고 그에 맞는 요소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니까요. 건축에 필요한 비계처럼 기획에도 비계가 존재해야 하고, 사용자나 소비자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 비계를 오르내리며 열심히 기획 작업을 하게 됩니다. 03.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비계를 거두지 않거나, 아니면 기획하는 자신들 스스로에게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비계 자체를 건축물에 녹여버리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즉 만드는 사람 차원에서의 검증과 앞으로 사용할 사람들 입장에서의 검증을 혼동해 빚어지는 일이죠. 그리고 저는 이런 문제가 꽤 큰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04. 과거 함께 일하던 동료 중에 '쓰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반복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말 자체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저희도 기획을 하다 보면 '지금 당장은 어색해 보여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소비자나 사용자도 이게 맞다는 걸 알게 되겠구나'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럼 최대한 '우리가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커뮤니케이션에 공을 들이게 되죠. 소비자들을 혼돈에 밀어 넣지 않도록 새로 바뀐 길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05. 하지만 그분은 이런 노력을 하는 분이라기 보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해진 비계를 거두지 않는 유형에 가까웠습니다. 뭐랄까요... 이제 건물이 완공되어서 계단도 제 형태를 갖추고 심지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까지 작동하는 중인데 본인만 여전히 외벽에 설치된 비계를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층계를 오르내리는 모양새에 가까웠달까요. 때문에 애초에 기획하기로 한 방향에서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고, 심지어 다른 동료들이 정상적으로 설계한 루트들을 '필요 없는 단계'로 치부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슬프고, 안타깝고, 화나는 일이죠. 06. 따라서 어떤 유형의 기획을 하든 간에 소비자가 사용하게 될 동선이나 기능과 또 만드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는 장치들을 헷갈리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비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협의해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요. 제품이 되었든 콘텐츠가 되었든 간에 이게 실제 사용자 경험에 녹아드는 것인지 아닌지를 스펙으로 구분해두고 언제 어떻게 제거할지 역시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07. 만에 하나라도 기획의 비계를 사용해 보다가 '어? 이거 정말 꽤 괜찮은 방식이다'라고 생각되면 오피셜하게 비계를 정식 스펙으로 등록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쓸데없이 지름길 하나를 더 파 놓거나 자기만 아는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대신 '이 방식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기획이나 설계를 다시 할까요?'라는 용기 있는 제안을 해보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일은 아주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니 확인 또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08. 외부든 내부든 같이 협업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거 원래는 안되는 건데요... 살짝 팁을 알려드리면 요렇게 ~ 요렇게 하면 되긴 되거든요'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 이분들이 아직 비계를 못 치우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래는 작업자만 다니는 길인데 급하시면 이용하셔도 됩니다 수준의 의미이니 말이죠. 09. 그러니 여러분도 기획의 어느 단계에서라도 이 비계에 대한 인식을 꼭 하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왜, 어떤 이유로 이 비계를 설치했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잘 제거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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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30일 오전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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