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걷던 사내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틀림없이 여기쯤인데, 너무 오랜만에 와서 여기가 맞는 것도 같고 저 길로 가야 할 것도 같고…” 함께 가던 친구가 그를 쳐다본다. “아니, 빨리 기억해
앞서 걷던 사내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틀림없이 여기쯤인데, 너무 오랜만에 와서 여기가 맞는 것도 같고 저 길로 가야 할 것도 같고…” 함께 가던 친구가 그를 쳐다본다. “아니, 빨리 기억해 봐. 한시가 급하다고!” 앞서 걷던 사내는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샛내 마을 삼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하지? 갈래 길 앞인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전화기에서 음성이 들려 온다. “그럴 수 있어. 그 동네 길들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워. 걸으면서 통화해 볼까? 지금 정면을 볼 때 왼쪽에 뭐가 보이지?” 함께 걷는 친구와 통화를 나눈 친구의 차이가 확연해 보인다. 당신은 대체로 어느 쪽에 속할까? 한 사람은 난처한 입장에 처한 상대를 몰아붙이는 스타일이고, 통화하는 친구는 함께 서서 같은 방향을 봐 주고 있다. 후자의 언어는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처’는 대체로 ‘언어’로 인한 상처를 일컫는다. 몸짓•표정•태도 모두 언어의 범주에 든다고 볼 때, 모든 폭력에는 언어 폭력이 깔려 있다. 언어는 사회적 상징체여서 현대의 언어들은 그 자체로 자본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어가 자본이라는 말은, 당신의 언어가 곧 삶이고 살림살이라는 의미다. 당신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내는데도 그를 옹호하거나 지지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소위, 실력은 있는데 인기는 없는 사람, 일은 잘하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없는 사람. 이들에게는 무엇이 결여돼 있을까? 만약 그 사람이 당신이라면 먼저 체크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혹시 타인을 소외시키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판단•비교•책임회피•부정•단정의 언어를 부지불식 간에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너는 이기적이야” “그 친구 참 편파적이야”라는 식의 판단과 단정의 말은 얼핏 간결하고 예리해 보인다. 하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그의 신념이나 관념의 올무에 걸려서 버둥거리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쟤네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 “네가 잘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 보니까 중간도 어렵겠네!” 이런 언어 사용은 해묵은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습관이기 때문에 스스로 객관화하기 어렵다. 습관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지적에도 강력 방어가 작동한다. 하지만 문제는 치명적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물과 같다. 자연스런 흐름에 든 물이 그렇듯 좋은 언어는 물처럼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이때 개인이건 조직이건 생기를 얻는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핵심이 ‘공감적 언어’다. ‘공감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칼 로저스는 좋은 소통과 관계의 핵심적인 덕목으로 ‘판단 없는 공감’을 제안한다. ‘판단 없는 공감’은 곧바로 화자와 청자의 연결성을 높인다. 어느 날 초등학교 교장 앨리슨은 운동장 한켠에 우울하게 앉아 있는 밀리를 발견했다. 그는 밀리의 곁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밀리,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니?” 밀리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제가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잠시 후 밀리는 선생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앨리슨 교장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비폭력대화’로 국내에 알려진 마샬 B 로젠버그의 사례다. 자신은 갖은 정성을 다하는데 자꾸만 ‘뒤통수’ 맞는 기분에 노출되는 사람이 있다. 혼신을 다해 상담이나 조언이나 정보 제공을 해줬는데 부정적 반응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문제는 미세한 독가스처럼 고요히 누적되었다가 맥락 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원인을 알기 어렵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당신이 만약 ‘열성을 다해 일하고도 욕먹는 경우’가 잦다면 그건 그런 흐름을 끊거나 뒤집거나 거부하는 언어로써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촘촘히 살펴보는 일은 성공하는 삶의 중요한 덕목이다. 마샬 B 로젠버그가 말하는 ‘공감’의 언어는 자연 현상으로 말하면 물처럼 흐르는 대화다. 즉, 말하는 사람의 말이 ‘흘러내리는 물’이라면 듣는 사람은 ‘흐름을 받는 물’이다. 상대의 말이나 주장이 물처럼 흐르게 하는 핵심적인 방법이 있다. 그냥 앞 사람의 말을 그대로 재현해 주는 것이다. 가령, “네가 쓰레기 처리를 안 하고 갔잖아!”라는 시비 조의 말을 듣는다면 “아, 내가 쓰레기 처리를 안 하고 갔단 말이지?”라고 재현해 준다. 당신은 이때 그의 언어를 받은 셈인가? 아니다. 살짝 솟구친 그의 감정을 받아준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에게 그 언어로 감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본질은 감정이다. 당신은 그의 언어를 받음으로써 드러난 감정을 수용해 준 것이다. 당연히 언어의 흐름에 물꼬가 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