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과일 상자와 손편지'를 현관 앞에 놓고 갔다 >
1 어느 날 현관 문 앞에 배 한 상자가 있었다. 배를 산 적이 없는데? 어디서 온 걸까. 보낼 사람도 없는데. 잘못 배달됐나 보다 했다. 2 상자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윗집에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다. 곧 인테리어 공사를 한단다. 며칠 시끄러운 예정이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과일을 보냈다. 3 직접 이야기하려 몇 번 찾아왔다. 하필 매번 집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손 편지를 적었단다. 또박또박 정성스러운 글씨의 긴 편지였다. 사람이 직접 쓴 편지를 정말 오랜만에 받았다. 4 보통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는 엘베에 공지를 붙인다. 기간은 언제고 어떤 공사를 하는지 알린다. 마지막엔 업체 현장 책임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다. 이렇게 해도 된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소란이 생기면 그 책임자가 정리할 테니까. 5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깜짝 놀랐다. 미안한 마음과 손편지와 과일. 내가 받은 건 배려다. 손에 쥔 건 과일지만, 전해진 건 마음이다. 그냥 남들처럼 해도 되는데. 굳이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상대방을 한번 더 생각한 그 맘이 너무 고마웠다. 6 사소한 배려란 얼마나 쉬운가. 뛰어오는 사람을 위해 엘베 열림 버튼을 눌러주기. 뒷사람을 보고 미닫이문을 잡아주기. 길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주기. 만난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기. 운전 중에 횡단보도 건너는 사람을 위해 멈춰주기. 누구나 할 수 있는 배려다. 7 큰 노력과 시간도 안 든다. 그리고 쉽다. 그럼에도 지금은 배려가 귀한 시대다. 나만 생각하고 살기도 바쁘다. 주변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채용 인터뷰에 지원자가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러려니 싶다. 사회는 점점 무덤덤해진다. 8 배려는 선물이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된다. 하지만 받은 사람에게 그 사소함은 오래 남는다. 기대에 없던 선물처럼 마음이 따스해진다. 9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남에게 나눠줄 순 없다. 배려를 하려면 내게 여유가 필요하다. 그 여유는 돈이 드는 게 아니다. 그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어쩌면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다. 10 윗집 공사 소음은 별로 시끄럽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이 없을 때 가장 큰 공사를 하니까. 그리고 배는 참 맛있었다. 올해 먹은 배 중에 가장 달았다. 나중에 윗집이 이사 오면 '배 정말 잘 먹었다'고 인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