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발행된 농업 잡지 에는 직접 수확한 수박 한 통을 든 채 활짝 웃는 ‘농부 공근식’ 씨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수박! 이제 상품성으로 선택하십시오”라는 다소 투박한 광고 문구와 함
1992년 발행된 농업 잡지 에는 직접 수확한 수박 한 통을 든 채 활짝 웃는 ‘농부 공근식’ 씨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수박! 이제 상품성으로 선택하십시오”라는 다소 투박한 광고 문구와 함께. 스물두 살 때였다. 24년 뒤, 러시아 최고 명문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학술 잡지 에 그 사진이 다시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한국에서 수박 농사 짓던 남성이 러시아에서 우주 항공을 배우고 있다”는 기사였다. 마흔여섯 살 때였다. MIPT는 ‘러시아의 MIT’로 불리는, 노벨상 수상자만 10명을 배출한 학교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격언,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만학도의 전설’ 공근식(54) 박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의 표본. “이런 사람이 있으니 변명도 못 하겠다”는 뜨거운 감탄. 근황이 궁금해서 지난달 아침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야 답신이 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핸드폰을 지금 봤다”고 했다. 그의 연구 분야는 극(極)초음속이다. 마하1은 음속, 그러니까 시속 1224㎞다. 마하5 직전까지 초음속, 마하5부터 극초음속이다. 시속 6120㎞ 이상. 그는 마하20 너머를 시뮬레이션한다. 주로 미사일 같은 우주 발사체 설계와 관련된 초고속 세계. 그러나, 곧 서술하겠지만, 그의 시작은 무척 늦었다. 1️⃣화제의 인물이 됐습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알아보시고, 아까 지하철에서도 유튜버가 말을 걸더라고요. 제가 걸어온 경로가 독특하긴 하죠. 2️⃣학업을 일찍 접었는데요. 🅰️철이 없었죠. 수학은 좋아했어요. 골똘히 풀면 되니까요. 나머지는 관심 밖이었어요. 외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성적은 형편없고, 대학 가기는 글렀고, 그냥 고2 때 ‘집안이 어렵다’ 둘러대고 그만뒀어요. 3️⃣뭘 하셨나요. 🅰️부모님을 도와서 수박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는요, 아무리 잘돼도 돈을 못 벌 때가 있어요. 오르내림이 심해요. 아버지가 뇌경색을 앓으셔서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가방 대신 비료 포대를 멨다. 3형제 중 장남, 뒷바라지한 두 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는 동안 그의 학력은 줄곧 ‘옥천고 중퇴’였다. 불편한 건 없었다. 야망도 없었다. 다만 갈증이 생겼다. 가끔 수박 팔러 대전 시내에 나가면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곤 했다. 4️⃣무슨 책이었나요. 🅰️수학책이나 과학책이요. 저희 수박 밭 앞에 금강이 흘렀어요. 쉴 때마다 강을 바라봤어요. 저 물살은 얼마나 빠를까, 여울은 왜 생기는 걸까…그런 생각을 했어요. 5️⃣범상치는 않았네요. 🅰️증세가 점점 심해졌어요. 농사 10년쯤 하니 흥미도 줄고…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제가 차가 없었어요. 배달업체 용달차 타고 같이 대전 공판장에 갔다가, 집에는 혼자 기차로 왔죠. 그러다 대전역 입구 게시판에서 눈이 멈췄어요. ‘성은야학’ 개강 안내문. “그날 집에 안 들어갔어요. 홀린 듯이 야학까지 걸어갔습니다. 역에서 가까웠어요.” 당시 대전 KAIST 박사과정 학생들이 자원봉사 교사로 있었다. 이수석•박현철•신건철…“인생을 바꿔준 평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6️⃣재밌었나요? 🅰️1년 6개월 과정이었는데요, 저는 5년 다녔어요. 너무 좋아서요. 주로 검정고시 준비 돕는 강의였죠. 평일 저녁 6시에 시작하니까 낮에 기차 타고 가서 수업 듣고, 야학에서 쪽잠 자고, 새벽 첫차 타고 집에 왔어요. 매일. 모터에 발동이 걸리니 멈출 수 없었다. “집중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더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주말에도 야학에 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반물리•고전역학 등을 KAIST 박사들에게 배웠다. 최고 두뇌들에게 공짜 1:1 과외를 받은 셈이다. 7️⃣이해가 잘 되던가요? 🅰️“선생님들이 설명을 쉽게 잘 해주셨어요.” 검정고시를 치렀다. 내친김에 수능도 봤다. 수박 농사를 병행해야 해서 집과 가까운 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에 갔다. 배재대 박종대 교수는 당시 서른네 살 공근식을 이렇게 기억했다. “질문이 많았어요. 수업이 끝나면 꼭 찾아왔어요. 순수물리학에 관심이 깊더라고요. 물리학은 근본을 따지다 보니 답이 없는 것도 있거든요.”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박 교수가 KAIST에 연락했다. “공부에 의지가 강한 학생이 있다”고. 이듬해부터 그는 KAIST 물리학과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청강생 자격이었다. 새벽에 밭으로, 낮에는 학교로 갔다. “좀처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수업 범위가 훨씬 넓고 빨랐거든요.” 보충 수업이 필요했다. 8️⃣어떻게 하셨습니까. 🅰️“옆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부탁에 능했다. 배움에 거침이 없었다. 이틀 뒤 충남대로 무작정 향했다. 물리학과 교수실로 갔다. 마침 박병윤 교수가 있었다.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사이. ”처음 뵙겠습니다. 이 대학 학생은 아니지만 강의를 청강하고 싶습니다.” 박 교수가 대답했다. “아, 그럼 그러세요.” 몇 번의 퇴짜, 몇 번의 허락. “제가 인복(人福)이 있나봐요.” 2년 동안 매일 카이스트와 충남대를 오가며 공부했다. 이 무렵 MIPT 연구원 2명이 한국에 왔다. 배재대에서 진행하던 연구 프로젝트 초청자였다. 그는 또 달라붙었다. “혹시 가르침을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일주일에 한 번, 4시간씩 빈 강의실에서 물리학 수업을 받았다. “제 영어가 서툴긴 해도 칠판에 쓴 수식(數式)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그가 당시 배운, 지금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물리학 개념은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다. 위치와 관련된 에너지, 그러나 경로와는 무관한 잠재력. 그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2010년, 태풍이 몰아쳤다. “비닐하우스가 전부 물에 잠겼어요. 철골은 다 우그러지고. 그때 결심했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생애 첫 유학을 결심했다. 행선지는 러시아. 과학 강국, 연구원의 추천, 금전적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2012년 예비 학부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이듬해 MIPT 물리공학과 입학 허가가 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실패였다. “한 학기 만에, 퇴학이었죠.” 9️⃣그래서…. 🅰️“창피하기도 하고 눈물도 났어요. 이제 다시 농사나 지어야겠구나.” 3개월 뒤, 이메일이 한 통 왔다. “해석이 잘 안 돼서 배재대에 계시던 고려인 교수님께 번역을 부탁드렸죠. 읽어보시더니 한국말로 그러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학교에서 다시 오라는데요?”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안내문. 나이 든 한국인 학생을 유심히 지켜본 노(老)교수 세르게이 파블로비츠 알닐루예프 덕분이었다. “제가 그 분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거든요. 시험 점수가 잘 나오긴 했는데, 청강생 신분이니 의미는 없었죠. 그런데 종이에 메모를 하나 써주셨어요. ‘2011년 6월 30일 양자역학 시험 통과. 다음 수업은 9월 3일에 시작이니 오시오.’ “제가 수업에 안 보이니 학교에 알아보셨나 봐요. 고비마다 항상 이끌어주는 분이 계셨어요. 저는 종교가 없지만 가끔 생각해 보고는 합니다. 인생이라는 게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아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절실하면 누군가 반드시 나타나는 것 같아요.” 🔟공부의 비결이라면요? 🅰️제가 농부였잖아요. 일단 새벽 일찍 일어나요. 고요하고 머리도 팽팽 잘 돌아가요. 능률이 높죠. 러시아는 겨울이 길거든요. 춥고, 졸리고, 수업 가기 싫죠. 그래도 이미 몸은 강의실로 움직이고 있어요. 농부가 밭 매러 가듯이요. 뿌린 대로 거둔다,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점심을 안 먹어요. 나이가 있다 보니 식곤증이 세게 와서요.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금메달 딴 10대들이랑 경쟁해야 하는데, 졸린 것보다 배고픈 게 낫죠. 지금은 습관이 됐어요. 러시아에서 진짜 천재들 많이 봤어요.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달라요. 뭐든 빨라요. 근데 포기도 빨라요. 저는 느리지만 계속하고 있을 뿐이고요.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공부에는 때가 있어요. 맞아요.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요, 반복을 이기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거예요. 한국 학생들은 초반에 두각을 빨리 드러낸대요. 근데 갈수록 뒤처진대요. 중국이나 베트남 학생들은 정반대예요. 걔네는 자주 만나고 서로 묻고 토론하면서 공부해요. 한국 학생은 혼자서 하죠. 혼자 하면 빨리 지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