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다시 만난 세계》
여느 때보다 어수선하고 심란했던 시기였지만 “과거가 현재를 구했다”라는 말처럼 가만히 한 달을 적어둡니다. ⠀ 한때는 아무리 바빠도 출근하는 날은 매일 뉴스레터를 쓰고, 커리어리에 아티클을 기록하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보낸 후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힘을 빼고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어렵습니다. 집에 온 택배는 아직 뜯지도 못했고, 연말을 보낼 멜버른 숙소도 예약하지 못했는데 계속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다행히 속도는 조절했지만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레드버스백맨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생각을 기록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 12월에는 쿠팡에서 함께 일했던 Justin 님 초청으로 LG전자 디자인센터에서 제조회사 디자이너분들과 제 생각과 시행착오를 나눴습니다. 함께 일했던 저스틴 님과 가끔씩 안부를 나누고, 지적 대화를 나누었는데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현대차에서 일할 때, 운전을 할 때 지나가며 마주치던 LG전자 서초R&D캠퍼스를 직접 찾아 UX연구소를 둘러보고 연구소장님과 인사도 나눴습니다. 저스틴 님 덕분에 막히는 경부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떠올릴 좋은 추억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 첫 회사에서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언더우드기념도서관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캠퍼스 시공은 대우건설이, 저희 팀은 ICT와 디자인을 담당했죠. 그때 만난 선배들과 클라이언트는 제게 드림팀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마음속으로 안부를 전할 뿐이지만 최고의 조합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볼거리와 놀거리가 부족한 국제캠퍼스에서 도서관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신입생들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책과 도서관에 이유 없는 애정이 생겼습니다. 최근에는 서울 유일의 트윈세대(13~16세) 전용 공간인 선유도서관에서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위한 제 고민을 사서분들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은 그들에게 SF 소설이자 시집이었고, 커뮤니티였습니다. 도서관을 닫고 긴 시간 애쓰며 준비한 공간과 프로그램에는 정성이 묻어 있었고 덕분에 트윈세대 사용자는 애쓰지 않고 즐겁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 레드버스백맨은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워라밸에서 중요한 건 워크나 라이프가 아닌 밸런스입니다. 최근 읽은 글처럼 워크-라이프는 단순히 On-Off가 아닌 0-10 사이의 스펙트럼입니다. 퇴근 후에도 일 생각이 이어지고, 일요일에도 월요일 걱정을 하는 게 자연스럽죠. On-Off라면 조명이 꺼지듯 단순하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ZEP 2024 Next Career Conference에서 저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해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진지함 대신 가볍게 툭툭하기 (2) 풋 브레이크를 보조하는 사이드 브레이크처럼 곁에 두기 (3) 멈추지 않고 계속하기 (4) 내가 좋아하는 일과 팀의 목표 사이에서 주제 고르기 (5) 본업에 충실하기 ⠀ 11월의 폭설은 복선이었을까요. “집회에 나간 모습을 전시하는 행위”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한강 작가의 책을 사러 서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보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들려 책을 구경하고 좋아하는 이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을 어떻게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요? 다른 생각에 대한 비판은 언제라도 괜찮지만, 조롱은 어느 순간에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노래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소녀시대 노래를 함께 부르던 사람들. 서강대교를 건너다 뒤로 보이는 국회의사당을 함께 바라보던 순간. 걸음을 멈추고 차도로 나가 응원봉으로 횡단보도를 쉽게 건널 수 있도록 차량을 통제하던 낯선 사람의 친절까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12월에 깨달았습니다. 12월은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의 취약함을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