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수학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교무실이 아니라 도서관 앞 벤치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야간자습을 하기 전, 뉘엿 저녁놀이 피어오르는, 대화하기에 딱 좋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수학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교무실이 아니라 도서관 앞 벤치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야간자습을 하기 전, 뉘엿 저녁놀이 피어오르는, 대화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담받아야 할 학생’이었다. “너는 수업태도가 참 좋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성적은 참 안 좋아” 대개 사람들은 여기에서 빵 터지며, 깔깔댄다. 잠깐 참으시고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시길. 선생님은 약부터 주시고 병을 주셨다. 아마 태도가 좋다는 말씀은 일종의 백신이었을 것이다. “너 같은 애가 대학에서 수학을 해야 해.” 선생님은 당신의 모교에 원서를 넣어볼 것을 권하셨다. 그리고 은밀히 말씀하셨다. "이번 마지막 기말 시험, 단원 **페이지에서 낼 거야. 잘 준비해." 선, 생, 뉨, 당신은 정녕 이토록 저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셨고, 바로 다음 수업시간에 모두에게 공개하셨다. 어찌했든, 절대평가인 내신에서 나만 잘 준비하면 마지막 기말시험은 100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80점을 받았다. 만족했다. 물론 대부분 친구들이 95점, 100점을 받았지만, 나는 만족했다. 내신에서 제일 큰 점수를 차지하는 수학에서 80점을 넘어본 건 2학년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시는 듯 나를 쳐다보시며 고뇌에 찬 신음을 토해내셨다. "도대체, 너는... 크흠.." 시험이 아무리 쉬워도, 아무리 어려워도 늘 비슷한 점수를 내는 또 하나의 과목이 있었는데, 국어였다. 국어는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통틀어 단 한번 시험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조금은 오르내림이가 있었던 내신에 비해, 수능 점수는 한결같았다. 96년 대입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선생님은 "웃으며 나오는 녀석은 너 밖에 없다. 어떻게 된 거냐?"라고 되물으셨다. 이날 1교시 언어능력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가버린 학생이 수두룩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수능시험이 정식으로 도입된 지 몇 해 되지 않았던 시기라 난이도 조절이 적절치 않았다는 평가였다. 재수 없는 줄 알지만, 수학에 잼병이 걸 감안해 이해해주길,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국어는 단 한번 시험공부한 적이 없었다. 언어능력과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지 애매하지만, 연애편지도 잘 썼다. 이 에피소드는 아까운 건데, 까짓 거 말 나온 김에 오늘 처음으로 썰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