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대형 서점에서도 한국 신문은 안 판다고 했다. 동네 편의점을 돌기 시작했다. 헛수고였다. 집 앞 편의점은 신문 매대를 아예 치워버렸다. 일곱 번째 편의점
[밀레니얼 톡]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대형 서점에서도 한국 신문은 안 판다고 했다. 동네 편의점을 돌기 시작했다. 헛수고였다. 집 앞 편의점은 신문 매대를 아예 치워버렸다. 일곱 번째 편의점에서야 신문을 찾았다. 서울에 살면서 신문을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요즘은 종이책 읽는 사람들도 보기 쉽지 않다. 대중교통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을 세곤 한다. 근 6개월 동안 본 바에 따르면 종이책을 보시는 분은 지하철 객차 한 칸이나 버스 한 대에 한 분쯤 되는 것 같다. 궁금해진다. 활자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여러 우수하고 헌신적인 분들이 이리저리 고심 끝에 만드는 기사와 책을 누가 보고 있는 거지? 영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주 만난 20대 중반 직장인은 “저는 요약본(영상) 없는 드라마는 안 봐요”라고 했다. 나는 16부작 드라마를 다 볼 엄두가 안 나서 영상을 잘 보지 않는데, 젊은 세대는 이걸 다 본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옆에 있던 30대 초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이 모든 일이 신기했다. 종이 신문을 잘 찾지 않거나 드라마 전체를 보지 않는 일은 놀랍지 않다. 볼 게 너무 많으니까. 신기한 건 신문 기사와 드라마의 일부가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신문이나 잡지는 뉴미디어와 대비되는 올드 미디어를 넘어 ‘레거시(유물) 미디어’라 불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유물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인간의 본능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재치와 웃음을 즐거워하고 그런 소식을 듣고 싶어 하지’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1667년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번창할 때의 노랫말이다. 일 때문에 만났던 어느 건축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건축은 이해하기 어려운 건데 이야기 형식으로 알려주면 일반인도 다 듣는다고. 자기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고. 인간의 본능이 그대로인 채 본능을 자극하는 기술만 발전한다. 오늘날의 이야기는 짧고 선명하게 초고속으로 퍼져나간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드라마를 캡처한 ‘짤’로, 책 속의 한두 줄을 발췌한 명언으로, 혹은 인간은 해독도 할 수 없는 인터넷 주소로 압축된다. 이야기는 생필품이며 뉴스에는 중독성이 있다. 재미, 흥미, 교훈, 쓸모, 이런 것만 있으면 된다. 가치 있는 이야기들이 잘리고 압축된 채 스마트폰의 소셜미디어 창에서 끊임없이 반짝이며 사람들의 욕구를 채운다. 그 과정 끝에 내가 조선일보에 보낸 원고가 내 어머니에게까지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지난번 원고는 아버지 이야기만 나와서 어머니가 아쉬워할까봐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었다. 굳이 종이 신문을 통하지 않아도 뉴스는 전달되니, 어머니도 글을 봤다고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담담히 옛 추억을 떠올렸다. “그래, 네가 어릴 때 귀 안 씻어서 다시 화장실 들어갔다 오고 그랬지. 그때 생각 나더라.” 당사자인 아버지 본인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직 모른다. 아버지와 자주 티격태격하는 엄마는 왠지 약 올라서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가 신문에 나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이 발달해도 아직 부부의 미묘한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박찬용 칼럼니스트·전 ‘에스콰이어’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