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때리는 그녀들(골때녀)’과 ‘마녀 체력 농구부(마체농)’와 ‘뭉쳐야 찬다(뭉찬)’ 같은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TV 속 플레이어들은 매번 악바리가 되어 죽기 살기로 승부에 진심을 보
‘골 때리는 그녀들(골때녀)’과 ‘마녀 체력 농구부(마체농)’와 ‘뭉쳐야 찬다(뭉찬)’ 같은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TV 속 플레이어들은 매번 악바리가 되어 죽기 살기로 승부에 진심을 보인다. 그들은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하기 위해 뛴다. 패스받은 공을 아무 데나 패대기치고 남의 골대로 역주행하던 장도연이 골대 밑 빈 곳으로 기가 막히게 들어가 레이업을 할 때, 계통 없는 춤사위로 웃기던 윤태준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파워풀한 스트라이커로 거듭날 때, 김준현이 햄스트링 올라온 다리로 축구장을 광폭 질주할 때,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축구도 농구도 처음인 그들은, 우리와는 출발선이 다른 저 세상의 에이스가 아니다. 바보같이 실수하고 땀 흘려 연습하고, 그럼에도 즐겁게 몰두해서 더 잘해보겠다는 아마추어들의 뚝심에 나는 크게 감동받는다. 그렇게 점점 3분 만에 너덜너덜해지던 몸이 10분을 버텨낸다. 헛발질에, 에어볼에, 어이없는 슬랩스틱을 일삼던 이들이 어느 순간 치고 달리며 빌드업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 저런 것이 의 저자 도리스 메르틴이 말하는 ‘새로운 탁월함’이 아닐까.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도리스 메르틴은 ‘탁월함은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려는 투지와 습관’이라고 정의했다. 탁월함은 곡예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니며 완벽함은 더더욱 아니다. 계속할 수 없다면, 공감받을 수 없다면 탁월함이 아니다. 반복해서 몸에 새기고 버텨서 한 단계 올라서는 그 자체의 탁월함. 상대를 압도하기보다 동기를 끌어내는 상호침투로서의 탁월함. 내가 도리스 메르틴 박사에게 ‘탁월함은 재능인가? 성실인가?’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탁월함의 시작은 호기심, 과정은 성실이다. 성실을 시스템화한 것이 좋은 습관이다. 우리가 삶에서 이룬 많은 것은 소소한 습관들의 영수증이다. 당신이 반복하는 행동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끈기와 품위’라고 배우 메릴 스트립은 말했다. 드라마 ‘파친코’로 노년의 커리어를 확장해가는 윤여정을 보고 드는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50년 넘게 갈고 닦은 저분의 ‘유머와 용기’가 이제야 물을 만났구나. 매일 아침 막막한 그라운드 제로에 서는 것 같아도, 우리도 어쩌면 ‘정체된 전진’을 하고 있겠구나.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부턴가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각자의 좌표를 갖고 전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잘 나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고 싶어서. 더 많은 안락이 아닌 더 많은 절제의 ‘더’. 여기서 ‘더’의 핵심은 자발적 고난이다. 며칠 전 우연히 나는 폴 블룸의 신작 에 추천사를 썼다. 원제는 ‘Sweet spot’이다. 더없이 탁월한 이 예일대 심리학자는 뇌는 쾌락만큼이나 고통을 환대하며, 우리의 본성은 안락한 감각만큼 의미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치밀하게 증명해낸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놀라운 문장을 발견했다. 인류는 진화를 위해 고난을 겪도록 설계됐다는 것. 우리가 환희와 쾌락 속에 머물지 않고 고통을 통해 더 개선되도록 만드는 것이 신의 목적이며, 진화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매일 ‘더’ 나아가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고유해진다. ‘더’ 하면 ‘the’가 된다. 결국 only one은 축적의 힘인 것이다. 더 할수록 점점 더 유일해지는 ‘더의 세계관(more=only)’은 완결의 세계가 아니라 무한 확장의 세계이며, 탐욕의 세계가 아니라 겸손의 세계라는 걸 조금씩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