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과 방전. 배터리에 쓰이던 두 단어가 언제부터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시작은 모르지만 현대인의 삶을 이만큼 잘 묘사하는 단어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어는 왠
충전과 방전. 배터리에 쓰이던 두 단어가 언제부터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시작은 모르지만 현대인의 삶을 이만큼 잘 묘사하는 단어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어는 왠지 인간을 배터리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느낌이라 전문용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그런 연유에서 주목받는 용어가 ‘번아웃(Burnout)’이다. 번아웃의 삼총사는 피로·냉소·무기력이다. 과도한 업무로 인한 탈진, 그로 인한 만성피로, 일과 사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절망. 이 증상들이 현대인의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면서 피로사회, 냉소사회라는 말까지 생겼다. 번아웃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번아웃을 열정을 불태운 헌신적인 사람들이 겪는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급기야 번아웃을 성공과 행복을 위해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여기기도 한다. 번아웃에 대한 현대사회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현대인의 삶은 번아웃이라는 침묵의 암살자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번아웃이 침묵의 암살자가 된 이유는, 그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려는 인식 때문이다. 명상·취미·걷기·여행·자존감 등 직장인 번아웃 극복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단골 키워드들은 모두 개인의 노력을 전제로 한다. 이런 번아웃 극복 프로그램들은 번아웃을 또다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2차 피해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이다. 섭섭함과 서운함이 번아웃의 본질이다. 물론 번아웃은 과도한 업무에서 오는 극단적인 피로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과도한 업무 자체가 번아웃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번아웃은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자신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촉발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섭섭함과 서운함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유발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종착지는 자신이 조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는 자괴감이다. 과도한 업무로 잠시 지친 심신은 재충전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섭섭함과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동반하는 번아웃은 상사와 동료가 함께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번아웃의 개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이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번아웃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역사적으로는 사회 복지나 의료 서비스처럼 사람을 돌보는 휴먼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적용되던 개념이다. 최선을 다해도 만족하지 않고 고마워하지 않는 고객들로 인한 마음의 소진이 번아웃의 최초 개념이다. 그리고 이 본질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번아웃의 본질은 섭섭함이다.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허탈감이 가미될 때 업무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 발전한다. 번아웃을 호소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일을 줄여주거나 휴가를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한다. 공정하지 못한 평가 시스템을 개선하고 리더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 술 한잔의 위로만으로는 번아웃을 막을 수 없다. 번아웃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도 기존과는 다른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 번아웃을 이기는 매우 효과적인,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방법은 타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베푸는 것, 그들을 친절히 대하고 존중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번아웃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자신에게도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느낌, 매터링(mattering)의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자괴감(doesn’t matter), 그 불쾌하고 우울하고 섭섭한 번아웃을 이겨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