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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참 흔하다. 특히 사람들은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존중하고 배려하고 싶지만, 그러기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참 흔하다. 특히 사람들은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존중하고 배려하고 싶지만, 그러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장애인 동료와 함께 활동하면서 장애에 대한 내 인식이 꽤 성장했다고 느끼고 있을 때쯤의 일이다. 나는 그 동료와 둘이 밥을 먹을 때 식사보조를 하면서 그에게 자주 잔소리를 했다. “천천히 먹으라니까. 이렇게 왕창 떠서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키니까 위장이 좋을 리가 있어?” 어느 날 그 모습을 본 선배가 혀를 찼다. “네가 식사보조를 못하니까 얘가 밥을 빨리 먹지.”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식사를 할 때 나는 그 동료가 먼저 밥을 먹게 도와주고 내 밥을 먹었다. 내 딴에는 당연한 배려였다. 그런데 그러면 내가 먹을 국이나 찌개가 식는다는 걸 아는 동료는 미안해서 매번 밥을 빨리 먹는 것이었다. 식사보조에 나보다 훨씬 익숙한 선배는 그에게 먹이면서 동시에 본인 밥도 잘 먹었다. 그리고 동료는 내가 나름 골고루 집어 주던 대로 먹던 것과 달리, 선배에게는 ‘이거 달라, 저건 싫다’ 부탁하면서 자기 식성대로 먹더란 말이다. 내 배려가 나를 배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비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존중과 배려가 더 쉬울까? 똑같이 힘든 일을 겪고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같이 있어주는 게 배려지만, 누군가에겐 당분간 모르는 척해주는 게 배려다. 같이 있어주길 바라더라도 어떤 사람에겐 그냥 들어주는 게 배려인데, 어떤 사람에겐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게 배려다. 우리의 선의는 이렇게 수시로 우리를 배반한다. 편의점에 갔는데 직원이 창고에 있어서 계산대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바쁜 직원을 배려한답시고 직원이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노동인권교육 시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말했다. “아, 손님이 부르면 걸어가는데, 기다리고 있는 걸 나중에 알게 되면 뛰어가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국에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턴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 줘. 꼭 그래야 돼!” 작곡가 백창우가 가락을 붙인 이 동요의 가사는 조민정 어린이가 일곱살 때 했던 말이다. 이 사회의 구조와 사회가 굴러가는 작동 방식을 모르면 나의 배려는 상대에게 오히려 불편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존중과 배려는 끊임없이 배워야 할 지식이다. 그것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수학공식 같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경험을 나눠야만 배울 수 있는 지식. 우리가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건, 다른 생각, 다른 욕망, 다른 습관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억울함과 피곤을 감수하면서, 또 끊임없이 서로의 필요에 감응하고 협상하고 조정하면서, 덜 외롭고 기쁨과 보람을 얻으면서, 나 자신의 성숙과 확장을 경험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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