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려면 직면해야 합니다》 자살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뉴욕에서 응급실 전체 환자의 10%가 자살 충동으로 온 사람들이죠. 미국에서는 '자살 생각이 심해지면 응급실을 찾는다'라는 인식이 일종의
《공감하려면 직면해야 합니다》 자살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뉴욕에서 응급실 전체 환자의 10%가 자살 충동으로 온 사람들이죠. 미국에서는 '자살 생각이 심해지면 응급실을 찾는다'라는 인식이 일종의 사회적 의료 공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떨까요?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합니다. '선택'이라는 말에는 '책임'이 따르죠. 만약 가족 중 한 사람이 자살을 했다면 그 책임은 어디에 전가될까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향합니다. "왜 너는 못 말렸어?", "네 아버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어?"라며 이중적인 죄책감,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불편한 진실을 모호하게 은폐할수록 역기능이 늘어납니다. '자살을 저지르다'라는 표현 대신 '자살로 사망했다'라고 단순한 게 표현해야 합니다. '모든 아시아인이 폭력적인 건 아니다'라는 표현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아시아인으로서 불쾌하고 상처를 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시아인은 폭력적이거나 위험하지 않다'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공감은 나의 표현이 다른 이에게 미치는 감정을 합리적으로 예상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언어 선택이 공감의 기본입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인터뷰'라고 합니다. 차트 기록을 보고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환자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꺼내죠. 의사는 충분히 들어줍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평생 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꼭 정신과 의사여야만 할까요?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내가 믿어주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믿어주는 한 사람이 되려면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가감 없이 들어주는 거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지, 나는 다른 시각이 있는데.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온전히 집중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잘 듣고 언어를 선택하면 힘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