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판단은 무수한 잡음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
01. 며칠 전 독서 모임에서는 이란 책으로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의 신작 을 다뤘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책이지만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는 편향(bias)과 잡음(noise)이 있는데 - 한쪽으로 쏠리는 편향에 비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잡음은 발견하기도 관리하기도 훨씬 어렵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잡음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장치들을 항상 고민해야 한다 정도입니다. 즉, 중요한 판단이 아주 작은 잡음들로 인해서 크게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을 늘 경계하라는 얘기죠. 02. 물론 이 책은 수치화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적인 부분에서의 잡음만을 다루고 있지만 저와 클럽 멤버들은 오히려 '개인의 선택에 있어서의 잡음'에 더 주목했습니다. 저자처럼 결정의 과정들을 수치화하고 공식화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판단이란 무엇이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는 또 무엇인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봤거든요. 03. 저 개인적으로는 '잡음을 인정하고, 잡음과 마주하고, 잡음을 교묘히 속이는'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다가가는 전략을 수립할 때 항상 큼직큼직한 이정표들을 바탕으로 과정을 설계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대부분 그러실 거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과정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잡음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공감되기 시작했습니다. 04. 그 안에는 타인의 잡음도 있지만 저로 인한 잡음들도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주말에 우연히 들른 매장에서 여기저기 남발해 놓은 컨셉의 디자인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은 상태인데, 공교롭게도 며칠 뒤 디자인 부서에서 제안한 내용에 그 요소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고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냥 왠지 스스로의 선입견에 가로막혀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더군요. 그 당시에도 뒤늦게 제가 잘못한 걸 깨달았지만 전 그게 '잡음'이라고 생각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는 그냥 서로 운 때가 맞지 않았다고만 생각했거든요) 05. 하지만 이제는 관점을 좀 바꿨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큼지막한 목표와 전략들 사이로 이들을 방해할 수 있는 작은 잡음들을 예측하고 관리해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좋은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관리하고 싶은 마음이 큰 거죠. 그중에서도 제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잡음을 완전히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잡음을 교묘히 속이는 Cheating 방식을 이용하는 겁니다. 06. 그러려면 먼저 저 자신을 잘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주요한 목표와 전략을 수행하는 나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부터 받아들이고 나의 컨디션과 심리상태, 성향과 장단점, 유독 영향을 많이 받는 요소와 타이밍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노력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좋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것 같을 때는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우선 그 순간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반대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상태일 때는 결정이 필요한 일들부터 찾아서 최대한 에너지를 투여해 보려고도 하죠. 07. 대니얼 카너먼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한다'는 정통경제학의 가장 기본 가정에 의구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했으니까요. 대신 그 자리에 심리학이라는 분모를 받쳐서 가장 인간다운 조건으로 경제학을 바라본 게 행동경제학이 가치 있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08.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어떤 목표나 전략을 수립할 때 방법만 정확히 갖춰지면 실행하는 건 그저 그 단계를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기본 가정부터 한번 바꿔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꽤 자주 목표를 잊어버리고, 가끔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전략을 수립하며, 심지어 이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수많은 잡음 속에서 허덕이며 나아간다'고 말입니다. 내용이 좀 부정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마 그 결과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이자 나다운 것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