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해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한 업체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는 말에, 일부 네티즌들이 ‘뭐가 심심하냐’면서 분노한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지식인
최근 ‘문해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한 업체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는 말에, 일부 네티즌들이 ‘뭐가 심심하냐’면서 분노한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은 요즘 세대의 어휘력 문제를 제기하며, 한자어 교육이나 독서 교육을 강조했다. ‘심심’이라는 어휘조차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말이다. 한편, 필자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칼럼 등에서 이 문제가 단순한 어휘력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태도라는 점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즉, 해당 사건에서 핵심은 ‘심심한’이라는 어휘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네티즌들이 상대방인 업체를 대하는 태도였다고 본 것이다. 합리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해당 업체의 공식적인 사과 공지를 보고, 설마 업체가 ‘지루하다’는 의미의 ‘심심’이라는 어휘를 쓸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식으로 반성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렇게 분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특정 사건이나 어휘를 둘러싼 문제만도 아니다. 이 사태와 관련해서도 ‘문해력’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더 넓은 맥락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터져나오는 이러한 ‘문해력 논란’의 핵심은 최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태도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이런 류의 문제들은 문해력이 아니라 ‘이해력’과 더 관련이 있다. 문해력이 통상적으로 글을 읽고 쓰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해력은 인간 삶 전반에 존재하는 타인에 대한 태도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한자어가 아니라, 바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태도 그 자체이다. 당장 사회 이슈와 관련된 유튜브를 둘러보면, 나와 다른 타인의 입장에 대해 차분하게 이해하고 판단하기를 권유하는 영상을 만나기 어렵다. 대부분은 팬덤과 구독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자극적으로 자기 편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상대편을 매도하는 영상들이다. 최근의 문화는 우리가 오로지 나 자신의 입장에만 더 깊이 몰두하도록 고도화되고 있다. SNS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할 만한 내용, 내가 동의하고 몰입할 만한 콘텐츠만을 계속 보여준다. 온라인 커뮤니티 또한 특정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뭉친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해 볼 여지가 점점 사라진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내가 보는 것들은 모두 나와 ‘동일’한 것들이다. 우리는 동일성의 세계에 갇혀 점점 ‘차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최근 ‘심심한 사과’ 논란만 해도, ‘심심한’이라는 어휘를 ‘마음 깊이’가 아닌 ‘지루하다’는 뜻으로 오독한 사람들이 모여 비난을 폭발시켰다. 그들은 업체의 사과를 받을 뜻이 없었고, 분노를 표출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비난과 분노를 원하는 서로 ‘동일한 사람들’끼리 모이니, ‘타자’인 업체의 입장은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의 남녀 갈등 그리고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갈등 등은 이러한 문제가 더 심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 중요한 개개인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한 번쯤은 이해해보려는 순간들이 중요하다. 나의 입장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것에는 ‘한순간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잠깐 내려놓는 그 용기가 요즘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결국 이해력, 즉 이해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사라진다.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서로에게서 이해받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문해력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용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