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는 자신이 루저(loser)같다고 했다. 단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의 삶을 루저로 만들었다고 했다. 몇 년 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던 금융공기업 건물을 지날 때면 더욱 더 그런 생각
젊은이는 자신이 루저(loser)같다고 했다. 단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의 삶을 루저로 만들었다고 했다. 몇 년 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던 금융공기업 건물을 지날 때면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당시 그 젊은이는 그 금융공기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도전을 선택했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민간 기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낮은 급여와 불안한 직업 안정성, 꼰대 같은 기업 문화에 실망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인생 루저가 됐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그가 느끼는 상심을 덜어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삶의 의미가 되는 일을 찾지 못하면, 그의 후회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의미가 되는 그런 일을 찾았을 때에만 비로소 낮은 급여와 해고의 두려움을 감수한 게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젊은이를 돌려보내면서, 그가 ‘루저’의 뜻을 다시 정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랬다고 해서, 스스로를 루저라고 규정짓는다면, 루저가 아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 중 99.9%는 루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루저는 어떤 사람일까? 문득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책 의 한 구절이 기억났다. “나는 실패(mistakes) 후에 이를 성찰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으려는 사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실패로부터 새로운 정보의 조각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당혹스럽고 방어적인 자세만을 취하는 사람을 루저(loser)로 규정한다.“ 이 구절을 곰곰이 되새기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그 젊은이는 진짜 루저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안타까움이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1️⃣그 젊은이는 실패를 잘못 정의하고 있었다. 그는 금융공기업을 선택하지 않고, 의미있는 일을 찾아 과감히 도전한 게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애초에 젊은이가 공기업을 거부한 건, 그곳에서 의미있는 일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다른 길을 선택한 거였다. 게다가 공기업은 그가 지금 몸담고 있는 기업보다 꼰대 문화가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한 곳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좌절 중 상당 부분은 공기업에 입사했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2️⃣그 젊은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진짜 실패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분명 실패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실패의 유형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자신과 주변의 기대치만큼 업무 성과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원하는 직무를 맡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무런 자율 없이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게 실패의 본질적 이유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가 좌절한 진짜 이유는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젊은이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단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금융 공기업을 선택하지 않는 과거의 선택만을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다. 3️⃣그 젊은이는 실패를 성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의 진짜 실패로부터 정보의 조각을 얻어,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4️⃣그 젊은이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수년 전, 단 한차례 잘못된 선택의 희생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실패를 운명 탓으로 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운명을 바꾸지 못하듯, 과거의 선택 역시 되돌릴 수가 없다. 그가 이 같은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지금 현실을 바꿀 구체적인 노력과 실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실패를 운명이나 과거의 잘못으로 돌리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새롭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쓰고, 그가 느끼는 좌절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승패는 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고 했다. 싸우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기나긴 인생을 살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그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실패했다고 루저가 되는 게 아니다. 실패로부터 배우지 않고, 지금 현실을 바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루저가 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에서 이런 말도 했다. “단 한번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보다 더 신뢰가 간다. 많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만 아니라면, 한번도 실수를 겪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간다.” 탈레브의 말이 옳다.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은 온실에서 안온하게 자라난 사람이다. 그가 실패하지 않도록 누군가를 그를 돕고 챙겨주었을 것이다. 그 같은 보호막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은 과연 제대로 현실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현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이런 상황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커온 어떻게 신뢰하고 함께 갈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보다는 실패를 겪은 사람을 더 신뢰하는 건 당연하다. 물론 실패는 고통스럽다.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성찰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 헤지펀드 브리지워터가 ‘고통+성찰=성장(pain+reflection=growth)‘이라는 공식을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트라우마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을 강조한다. 트라우마 후에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루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