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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하나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몇몇 단어는 그렇다. 대표적인 게 ‘그러나(but)’와 ‘그리고(and)’이다. ‘그러나’를 쓰지 않고 ‘그리고’를

단어 하나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몇몇 단어는 그렇다. 대표적인 게 ‘그러나(but)’와 ‘그리고(and)’이다. ‘그러나’를 쓰지 않고 ‘그리고’를 많이 쓰는 사람이 사고가 더 유연하고 혁신적이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더 많이 생각해낸다. 그 결과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게 된다. 반면 ‘그러나’를 많이 쓰게 되면 사고가 경직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직장인 A가 “나는 토요일 가족과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가고 싶다. 그러나' 일을 해야 해.”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러나’라는 단어 때문에 뮤지컬 관람과 일은 양자택일의 모순 관계가 된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못하게 된다. 뮤지컬을 보면 일을 못하고, 일을 하면 뮤지컬을 못 보러 간다고 인식하게 된다. 반면 직장인 B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토요일 가족과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가고 싶다. ‘그리고’ 일을 해야 해.” 이 사람 머릿속에는 뮤지컬 공연과 일이 모순되는 게 아니다.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없다. 뮤지컬도 보고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방법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가족과 여유롭게 뮤지컬을 즐긴 다음, 토요일 밤에 드라마 시청 대신 일을 할 수 있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일도 해내니,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더 행복해진다. ‘그러나’는 앞뒤 문장을 양자택일의 모순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결과적으로 해법을 찾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반면 ‘그리고’에는 그런 부작용이 없다. 비록 앞뒤 문장에 어느 정도 모순이 있다고 해도 해법을 찾아서 모순을 없애는 힘이 있다. 기원전 280년 무렵 완공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예로 들어보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등대는 14세기 초 대지진으로 붕괴되기까지 거의 1600년간 지중해의 밤을 밝혔다.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이집트의 위대한 건축가 소스트라투스(Sostratus)의 작품이다. 소스트라투스는 이 위대한 등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어 했다. 그 등대를 만든 건축가가 자신임을 후대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이 사실을 알면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당시 이집트 왕 역시 등대를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소스트라투스가 ‘등대에 이름을 새기고 싶어. 그러나 그랬다가는 왕에게 죽임을 당할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름 새기기와 목숨 연명은 양자택일의 모순 관계가 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게 된다. 그러나 소스트라투스가 “등대에 이름을 새기고 싶어. 그리고 천수를 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맥락이 달라진다. 이름 새기기와 천수 누리기는 ‘그리고’로 연결되면서 둘 다 쟁취 가능한 것이 된다. 실제로 소스트라투스는 혁신적인 해법을 생각해낸다. 우선 등대의 단단한 돌에 자기 이름을 큰 글씨로 새겨 넣었다. 그리고는 돌 위에 회반죽을 발랐다. 그 위에는 왕의 이름을 새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회반죽은 조금씩 마모가 됐다. 왕의 이름은 점점 흐릿해졌다. 회반죽 아래 돌이 드러나면서 소스트라투스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소스트라투스는 천수를 누렸다. 그가 죽고 세월이 더 흐르자 회반죽은 완전히 마모됐다. 왕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아래 돌에 새겼던 소스투라투스의 이름은 계속 남았다. 세상 사람들은 소스투라투스의 사후에도 등대가 그의 작품임을 기억하게 됐다. 그는 천수를 누리면서도 이름을 남기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다. 소스트라투스는 이름 새기기와 천수 누리기를 양자택일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만약 모순 관계로 여겼다면, 회반죽에 왕의 이름을 새기는 창조적 해법은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의 파괴적 부작용은 회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들끼리는 회의를 오래 해도 좋은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 목표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없는 핑계를 찾게 된다. 베스트셀러 작가 다니엘 핑크가 저서 에서 제시한 ’그래, 그러나(yes, but)‘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창회 모임을 열자” “그래,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그래, 그러나 정말 오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참석할 거야.“ “그래, 그러나 반 친구 중에 일부는 도박을 하지 않잖아.“ “그래, 그러나 블랙잭 말고도 거기는 할 게 많아.” “그래, 그러나 도박 말고도 가족을 데리고 오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야.“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그래, 그러나“는 앞사람의 말을 비토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생각에 태클을 걸게 된다. 당연히 어떤 긍정적인 결론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래, 그러나(yes, but)’ 대신 ‘그래, 그리고(yes, and)’를 쓰면 대화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창회 모임을 열자.” “그래, 그리고 그게 너무 비싸면, 돈을 모을 수 있고, 여럿이 모여 자동차로 갈 수도 있지.” “그래, 그리고 우리가 일찍 준비하면, 호텔 방을 단체로 예약해서 할인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리고 도박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데리고 가족과 함께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낮 시간에 즐길 거리를 준비할 수도 있지.” “그래, 그리고 참석자가 충분히 많기만 하면, 돈을 갹출해서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수 있어. 그러면 하룻밤 정도는 부모들만 외출할 수 있어.” 동창회 모임을 효과적으로 열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나온다. 예상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자연스럽게 논의된다. ‘그러나’를 말하는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창회 모임을 열지 못할 갖가지 핑계를 발견한 것과는 정반대다. 이제 우리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즉 and를 말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단어 습관 하나를 바꿈으로써 당신은 더욱 혁신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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