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몰이'의 의사 결정
01. 옛날에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는 되는 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거였죠. 하지만 꽤 많은 것들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이 사람은 이런 결론을, 저 사람은 저런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가면 갈수록 헷갈리는 영역도 정말 많습니다. 02. 그중에 대표적인 게 아마도 '의사 결정'일 겁니다. '좋은 의사 결정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지금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거든요. 그동안 나름 중요하고 굵직한 결정들을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결정에 과연 '기준'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정말 어려운 영역이자 어쩌면 의사 결정을 내릴 일이 없어지는(?) 순간까지도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문제니까 말이죠. 03. 제가 회사에 와서 상위 조직장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 중 하나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였습니다. 네 당연히 저도 처음엔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들이 어딨나 싶은 생각을 했었더랬죠.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는 '의사 결정 하라고 앉혀 놓은 사람들이 저렇게 모른다는 말을 남발하면 어떡하나'하는 비난 섞인 심정도 꽤 자주 일렁였습니다. 04. 하지만 이 말 역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 , '사람 바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리더마다 '모른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라는 말 뒤에 따르는 행동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죠. 가장 이상적인 리더의 경우는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답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쓰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어느 순간 그 의견들을 수렴해서 좁혀나가기 시작해야 하는지 타이밍을 잘 맞춰냈죠. 열어두고 다듬고, 열어두고 다듬고를 계속 반복하며 사람들 스스로가 방향을 잡아가도록 도와주는 방법이었습니다. 05.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굵직한 결정들에 자신의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상은 '뭔가를 합시다'라는 결정보다 '이건 이제 옵션에서 제외합시다'라는 제거의 결정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단 번에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가장 길이 아닐 것 같은 경로부터 하나씩 소거해 사람들에게 비슷한 목표와 분위기를 느끼도록 해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결정이었죠. 06.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어느 순간 조직 전체가 아주 스무드한 합의에 이르러 간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세스에서 선명하게 느낀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었는데요, 바로 의사 결정자가 뭔가 판단을 내리는 순간에 조직원 누구도 그 결정을 뜬금없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그 결정에 반대하거나 혹은 아쉽다는 판단을 하는 사람은 봤어도 '엥? 갑자기?!'라는 수준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또 황당하게 만드는 결정은 없었던 거죠. 저는 이 정도의 합의만 되더라도 사실상 현실 세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의사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지는 않으니까요. 07. 한 가지 더 보태자면 그런 의사 결정자들은 자신 위에 있는 차상위 결정자들에게 늘 상황을 공유하고 자주 피드백을 받아온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한 방에 보고해서 한 방에 통과시키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았거든요. 대신 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미리 상위 결정자들을 조금씩이라도 설득해 놓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밑밥'이라고 표현했지만 저는 서로 생각의 위치를 공유하는 아주 중요한 행위였다고 봅니다. 08.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가 '나도 잘 모른다',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라고 할 때 그리 큰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면 '자, 이제부터 저 사람이 어떻게 판을 깔고 행동하기 시작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좋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서 조금씩 방향 몰이를 이뤄내는 의사 결정을 할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혼자서만 머리를 싸매다 불현듯 스친 감정 하나에 의지해 의사 결정을 내릴 테니까요. 09. 그러니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아니 하물며 나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조차 이것 하나 정도는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결정은 쾅 하고 내리찍는 게 아니라 조금씩 방향타를 수정해 가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