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는 '챙기는 것'
01.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저 스스로 가장 먼저 환상을 깨부신 단어는 바로 '크리에이티브'였습니다. 대학 시절엔 광고 회사 입사를 꿈꾸며 그 누구보다 크리에이티브에 욕심을 내고 또 애착도 가졌지만 회사에 들어와 보니 희번뜩한 아이디어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군요. 오히려 진짜 별것 아니어 보이는 그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모두의 생활과 관념을 바꾸는 혁신을 일군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는 크리에이티브란 단어를 좀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죠. 우선 저처럼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예술가가 아니니 아티스트 향의 크리에이티브와 비즈니스 향의 크리에이티브를 구분하는 것이 먼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2. 그리고 이번 달 독서 모임을 준비하면서 이 고민을 조금 더 구체화해보기 시작했죠. 이번 책은 픽사에서 20여 년 간 스토리텔러로 활약한 매튜 룬의 이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추천사를 쓴 책이기도 합니다!) '기획자의 크리에이티브'라는 이번 모임 키워드를 다루기 위해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픽사는 예술의 영역과 비즈니스의 영역이 혼재된 곳에 위치한 브랜드이지만 이 두 세계를 정확히 알고, 또 자유자재로 넘나들기 때문이죠. 더불어 저자인 매튜 룬 역시 작품 속에 녹아있는 스토리텔링의 포인트를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03. 멤버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더 분명해진 생각은 '크리에이티브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도, 어디선가 멋지게 발견하는 것도 아닌 끊임없이 챙기고 또 챙겨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도 '혹시 저희가 뭐 또 빠뜨린 게 없을까요?'라는 말이거든요. 단순히 기획서에 누락한 것이 있을까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옵션 중에 아예 고려해 보지 못한 것은 없는지', '만에 하나라도 있을 법한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 못한 포인트가 있을지'를 걱정하기 때문에서죠. 그러니 갑자기 머리를 쾅 치는 아이디어에 확신을 가지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쌍끌이 어선처럼 그물을 펼치고 바닥에서부터 뭐가 걸려 올라오는지를 확인하며 가는 모양새에 더 가까운 셈이죠. 04. 개인적으로는 크리에이티브를 챙기기 위해 크게 3가지 정도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입니다. 사실 전혀 모르는 것들 속에서 새로운 인풋을 발견하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경험하거나 확신하지 못한 것들로 타인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죠. 대신 그동안 내 머리와 감정을 스쳐 지나갔던 것들 중에서 다시 한번 생각의 물꼬를 터볼 만한 대상들을 선별해 보면 의외로 새로운 관점을 얻을 확률이 높습니다. 일종의 기억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죠. 05.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문을 구체화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요, 다른 사람에게 묻든 나 스스로에게 묻든 간에 우리 눈앞에 있는 문제와 관련한 디테일한 상황을 설정해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활용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모은 질문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다 보면 자연스레 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과정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파묻힌 답을 꺼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06. 두 번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작업'입니다. 픽사는 작품을 기획할 때 초기 컨셉이 확정되고 나면 그 즉시 브레인스토밍을 멈추고 각자 아이데이션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기획 초반부터 의견이 하나로 급하게 모아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죠. 이처럼 기획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가급적 서로 극과 극에 해당하는 지점까지 멀리 떨어져 본 후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다른 시각을 비교해가며 어떤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감을 잡기도 좋고, 서로 겹치는 포인트가 있다면 그 지점을 중요하게 다루기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죠. 07.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본인을 떨어뜨려 보는 것'입니다. 이건 실제 물리적으로 외부 환경을 바꾸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환기를 위해서 저 멀리 떠나거나 매일매일 새로운 인풋을 수혈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죠. 그 대신 본인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배제하고 시작해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가장 뻔하고, 가장 편하고, 가장 진부하고, 가장 재미없을 것 같은 방법을 먼저 상정해 보는 것'입니다. 신박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려고 골을 싸매는 게 아니라 '이것만은 절대로 해선 안되겠다'싶은 뻔하디 뻔한 아이디어를 지워보는 거죠. 그럼 의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옵션이 저절로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기준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이것들만 피해 가도 꽤 여러 가지 대안이 발견되곤 하죠. 08. 물론 이런 방법들을 쓰더라도 끝끝내 좋은 아이디어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을 받는 포인트는 이 과정이 결코 헛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번에 당장 쓰지 못한 아이디어라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꺼내 살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며 디벨롭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있거든요. 가끔은 '이럴려고 그 때 고배를 마셨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적으로 부활하는 아이디어도 비일비재합니다. 09. 그러니 여러분도 본인의 감각을 탓하는 습관이나, 창작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필요한 크리에이티브를 '챙긴다'는 기분으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부터 챙겨보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로부터도 하나씩 챙겨보고,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디어를 제외한 그 나머지 것들부터 또 천천히 챙겨 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여러분들 손에 의외의 수확이 들려있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세상에 창작의 왕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그 간절한 마음 하나로 마지막까지 샅샅이 뒤져보다가 손끝에 걸린 그 아이디어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는 것일 테니까요. 여러분도 여러분들 주변의 그 작은 크리에이티브 조각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열심히 챙겨보시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