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지인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어두웠다. 뭔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 같아, 다시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지인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어두웠다. 뭔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 같아, 다시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회사 일 때문이라고 했다. 별일 아닌데, 자꾸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비용 지출 업무를 ‘원칙’에 따라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이 그 결정에 이의 제기를 했다고 한다. 온정주의적으로 결정해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원칙뿐만 아니라 관례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동료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동의와 인정을 못 받았다고 했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필자는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을 담아 “바로 그게 모범생 신드롬이야”라고 말해주었다. “모범생은 잘했다는 칭찬과 인정을 받고 살아왔지. 그걸 못 받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해. 네가 지금 그런 것 같아. 길 가는 사람 10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아마 9명은 네가 옳다고 할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데도 너는 지금 괴로워해. 네 결정에 대해 동료들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인 거 같아. 모범생 신드롬이 아닐까 싶어.” 나의 말에 그는 웃었다. 솔직히 그와 나는 어릴 적에 모범생 소리를 곧잘 들었다.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도 받고 인정도 받았다. 그건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그 신호에 우리는 안심도 하고 자랑스러움도 느꼈다. 그러나 그 모범생 신호가 우리 마음속에 너무 깊이 각인된 것 같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칭찬과 인정을 욕망한다. 그걸 얻지 못하면 큰 돌이 우리 마음에 올려진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지인이 옳은 결정을 하고도 무거운 마음을 떨치지 못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물론, 인간이 무리 속에 사는 이상, 칭찬과 인정이 필수불가결한 것도 사실이다. 무리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다는 신호가 칭찬과 인정이다. 그 신호를 잘 따라야 무리에서 왕따가 안된다. 무리에 소속될 수 있다. 인간은 소속감 없이는 못 산다. 그러나 칭찬과 인정에 집착하면 자기 생각을 잃는다. 남의 생각대로 살게 된다. 만약 내 지인이 회사 동료들의 칭찬과 인정에 집착했다고 해보자. 그래서 그들을 위해 온정주의적인 결정을 했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것은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동료의 칭찬과 인정을 얻는 것이다. 자꾸 이런 식으로 칭찬과 인정에 집착하면, 자기 삶을 잃게 된다. 대신 남의 삶을 살게 된다. 상대방의 칭찬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방의 가치관과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직장 상사의 칭찬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사의 가치관대로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가 원하고 자기에게 맞는 삶이 아니라, 상사를 비롯한 타인이 내게 원하는 대로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의 가치관에 따라 산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최상급의 ‘아부’다. 그의 가치관을 내가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건 그의 가치관이 옳다는 걸 내가 수용했다는 걸 뜻한다. 상대방에서 말로써 ‘당신이 진정 옳다’라고 해도 아부이거늘, 행동으로 이를 보여준다면 상대는 얼마나 기뻐할까. 당연히 상대는 나를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상대는 그 순간에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다. 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움과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옳음을 확인하는 순간 쾌락 호르몬이라고 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윗사람들이 본인을 따르는 직원들을 좋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나도 부장이 기사의 취지를 불러주면 노트북에 그대로 타이핑하곤 했다. 기사를 쓰면서 그중 하나라도 빠진 게 있는지 체크하곤 했다. 솔직히 말해 부장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한 거였다. 부장의 가치관과 생각을 구현한 기사를 써서 그의 생각이 타당함을 확인시켜준 거였다. 그러면서 나는 종종 ‘바로 이런 게 사회화라는 거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부장도 분명 어린 기자 시절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기사를 쓰면서 상사의 가치관과 생각을 흡수했을 것이다. 그 상사의 가치관은 내 데스크에게 전수됐고, 그 가치관은 이제 내게도 전수됐다. 이런 식으로 신문사의 철학과 논조는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조직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나’가 사라진다. 나의 고유한 정체성이 희미해진다. 조직의 다른 사람들과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해진다. 조직에서 적응하고 생존하기에는 이 방법이 유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삶을 놓고 판단할 때 과연 이게 바람직한 것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나를 잃어가며 얻은 인정과 칭찬이 무슨 소용인가. 그 대가로 내 삶을 잃고 남의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는 조직 전체에도 해가 된다. 조직원들이 사회화를 거쳐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해지면 다양성은 사라지게 된다. 획일화로 기울게 된다.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조직의 혁신 역량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의 칭찬과 인정에 집착하지 말자. 특히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의 칭찬에는 더욱더 그래야 한다. 당신의 그의 칭찬에 집착해 그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불행한 삶을 당신도 살아보겠다는 뜻이 된다. 대신 나의 생각이 아무리 작고 연약하더라도, 그 생각을 돌봐야 한다. 그 생각을 키우고 표현해야 한다. 일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런 게 없다면 살아도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타인의 삶을 사는 게 된다. 그럼 우리 삶의 의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