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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1 ‘내면 소통’ 저자 김주환 교수님이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국내에 번역서가 없었다. 출판사를 직접 알아보고 번역해서 내셨다. 그래서 그냥 믿고 읽었다. ​ ​ 2 알아차림이란 뭘까.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있어야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측정이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 ​ 3 또, 습관을 다룬 많은 책에서는 습관을 만들려면 작동하는 신호를 먼저 인지하라고 한다. 여기서 습관을 불러오는 시그널, 그걸 인지하는 게 알아차림이다. ​ ​ 4 책은 명상을 중심으로 나의 알아차림을 이야기한다. 나를 알아차리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일까? 내 몸일까, 내 생각일까, 감정일까. 모두 아니다. 그것들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다. ​ ​ 5 영화와 스크린의 비유가 쉽게 와닿는다. 진짜 나는 스크린이다. 스크린에는 영화가 투영된다. 우리는 영화를 본다. 하지만 스크린은 잘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화를 진짜 나, 그리고 현실로 생각한다. 그래서 스크린을 의식하는 일,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 ​ 6 정말 알아차리는 건 알아차림의 알아차림이다. 어떤 생각을 알아차린다. 내가 그 사실을 알려면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하는 거다. 메타인지다. 그런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나라고 말한다. 문장으로 쓰면 정말 어려워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단순하고 놀라운 생각이다. ​ ​ 7 책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알아채고 있는가?’라는 주문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가벼운 문장이 정말 변화를 만들어줄까. 아주 가볍게 생각하며 스스로 질문해 봤다. 단순한 두 개의 물음표가 정말 순간의 알아차리는 순간을 불러와줬다. ​ ​ 8 성장하고 싶어서 글을 읽고 글을 쓴다. 텍스트와 글은 재료다. 새로운 생각을 접할수록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앎이 넓어진다. 알지만 표현하기 어렵다. 모순적이다. 그래서 또 재밌다. ​ ​ ​​ 밑줄 친 문장들 ——— ​ ​ ​1 내 생각도, 나의 감정도 내 것일 뿐 내가 아니다. 내 생각이나 감정은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일 뿐 내가 아니다. 나의 경험, 감정, 생각, 기억, 느낌 모두 다 마찬가지다. 내가 알아차릴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내 경험과 인식의 대상일 뿐, 즉 내가 지닌 어떤 것일 뿐 나 자신이 아니다. 일상적인 관념에서 나의 일부라고 믿었던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 ​ 2 나는 인식주체다. 경험의 주체다. 따라서 나에 대한 묘사는 불가능하다. 실체라 할 것도 없다. 인식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나는 나를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 ​ ​3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했던 순간이 반복되기를 바라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상적 경험을 추구하거나 싫어하는 대상적 경험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결핍, 탐색, 일시적인 충족이라는 무한한 순환에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 ​ ​4 우리는 대상적 경험의 일종으로 행복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본래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행복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불행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불행은 우리가 대상적 경험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5 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의 한계, 몸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몸의 속성과 한계와 혼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인 에고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별적 자아가 곧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요. 참되고 유일한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입니다. ​ ​ ​6 우리가 영화의 내용에 몰입하게 되면 스크린은 잊히거나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스크린은 항상 우리의 눈에 보이고 있지만, 영화에 빠져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늘 현존하며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상적 경험에 몰입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스스로 아는 것을 멈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 ​ ​7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차리고 있다는 경험으로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알아차리고 있다는 경험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 ​ ​8 사실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것이 특별히 새롭거나, 신기하거나, 드물거나, 이례적인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알아차림이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익숙하고 평범한 경험이죠.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의 본질적이고도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존재에 대한 앎입니다. 아이엠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그 단순한 경험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앎입니다. ​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그렇다라는 대답은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알아차림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알아차림의 작용 자체입니다. 마치 영화가 스크린 위에 독립적인 실체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크린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 ​9 마음은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색칠하는 활동입니다. 반대로 색칠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색깔이 지워진 마음의 본래 상태인 순수한 알아차림을 드러내는 것이 명상입니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알아차림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비대상적 경험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던지고 난 후의 본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순수한 마음이며 알아차림 그 자체입니다. ​ ​ ​10 명상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상은 스스로에게 돌아가기, 또는 스스로를 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는 어떤 행위가 필요합니다. 생각, 느낌, 행동, 지각은 모두 마음의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행위들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더 이상 행위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일 뿐이지요.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즉 알아차림이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경험입니다. ​ ​ ​11 마음이 자신의 경험인 대상적인 내용에서부터 출발하여, 가장 깊은 곳에 있고 항상 존재하며 환원 불가능한 본질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동양에서는 명상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기도라고 불러왔습니다. ​ ​ ​12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개별적인 자아가 존재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저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본래적인 평온함과 무조건적인 충만함 속에서 편안히 쉬는 존재.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존재뿐입니다. ​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즉 우리 자신이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심장은 갈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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