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도 MOQ 위에서나 존재한다
01 . 특정한 책을 비난할 목적은 전혀 없습니다. 책이야 늘 각자의 취향 범주에 들어가는 영역이고 누군가에게 시시한 책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일에는 두 팔 벋고 나서지만 개인적으로 별로였던 책을 굳이 깎아내리지는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02 . 그럼에도 이 기사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중간중간 자극적인 워딩이 사용되긴 했지만 그 주장엔 어느 정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죠. 특히 인상 깊었던 문장을 몇 개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으로 무조건 개인의 노력만을 주장하는 책들이 쏟아지는데, 그럴수록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책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 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나 지식을 담은 양서가 소외되면 결국 공동체의 사유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 💬 출판이 독자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세계를 제공해야 하는데 한국의 베스트셀러 시장은 쏠림 현상이 심하다 못해 다른 장르를 죽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지 못한 채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저자를 앞세운 책에 골몰하는 최근 출판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올해 무(無)시간적인 자기계발서가 유행한 가장 큰 요인은 시대정신을 담은 양질의 콘텐츠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03 . 어떤 분야든 '베스트셀링'되는 대상들은 그 시대가 원하는 것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겠다는 것을 두고 '왜 그것을 사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죠. 다만 무엇인가가 불티나게 팔릴 때 그 현상을 진단하고 반대편에서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것은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세일즈 전략을 떠나서 시대의 파도를 타고 넘는 부류가 있으면 반대편의 파도를 끌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야 소비자들은 훨씬 나은 선택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04 . 저도 요즘 연말연시라 책 선물을 할 일이 더 많아지고 그럴수록 서점을 방문하는 횟수가 더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기웃거리다 '인생에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라는 큐레이션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솔직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마음이 부서지는 듯했습니다. 저런 말로 책을 팔겠다는 사람과 저런 말에 책을 사겠다는 사람 사이의 거래가 이뤄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가 그지없었기 때문이죠. 05 . 하지만 더 속상한 건 모두가 너무도 쉽게 베스트셀링 되는 것들의 문법과 화법을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팔리는 것들의 소구점을 분석하고 빠르게 벤치마킹하는 것을 두고 현실감각 떨어지는 훈수를 두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 자신의 문법과 화법을 개발할 수 있는 사람들도 큰 고민 없이 팔리는 방법부터 먼저 체득하게 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은 글이 탄생할 수 있는 활로가 막히는 것이니 그게 너무 화나고 슬플 뿐이죠. 06 .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다양성도 MOQ(최소 주문 수량-Minimum Order Quantity) 위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 가슴 아픈 말을 감히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성이라는 문화적 가치와 수량과 가격이라는 경제적 가치의 밸런스가 함께 공존하는 문구이기 때문이죠. 출판사들의 속사정도 모른 채 '왜 가벼운 출판을 하는가'라고 부르짖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팔리니까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만드니 팔리는 거죠'라는 고민 없는 생산 방식에도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07 . 대신 의미 있는 시도들이 MOQ를 넘을 수 있는 그 발돋움판이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인생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이라는 수식어를 들이밀면 '왜 인생에서 꼭 한 편만 봐야 해요?'라고 생각하실 거잖아요. 저는 그게 다양성의 MOQ를 만드는 첫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조금 더 보고, 책을 조금 더 사고, 책을 조금 더 다양하게 고르고, 책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요. 그게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들의 MOQ를 맞춰주는 것이니 말이죠. 부디 새해에는 조금이나마 이런 기조들에 변화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