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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회사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몇 년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요즘은 뭘 연습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만둔지 조금 됐단다. 대신 최근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퇴직 이후에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회사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몇 년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요즘은 뭘 연습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만둔지 조금 됐단다. 대신 최근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퇴직 이후에 도움이 될 공부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필자가 피아노를 치는데 동기부여를 준 선배였다. 피아노를 즐기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왜 그만두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녀는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이 좋았으나 뚜렷한 목표와 실리적인 결과물이 없다 보니 차츰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선배를 만난 날은 마침 피아노 학원을 가는 날이었다. 퇴근 후 평소처럼 악보를 펼치고 건반 앞에 앉았다. 바흐의 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눈은 악보를 따라가고 손은 음을 짚고 있지만 마음은 어딘가 저 멀리 다른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사실은 최근 필자도 그랬다. 피아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내적 충만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기쁨이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시간과 비용을 좀 더 필요한 데 써야 하지 않나?’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오기도 한다. 운동이라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실리적인 이득이라도 있지만, 피아노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연주하고 싶은 곡을 배우고 익힌 다음에는 뭐가 있지? 전문 연주자가 될 것도 아니고, 이걸 배워서 도대체 무엇에 써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림책이 잘 풀리지 않아서다.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도 달리는데 할 일은 많다. 회사와 가정의 일을 안 할 수도 없다. 주 2회, 퇴근길에 한 시간씩 배우는 피아노를 줄인다고 더 많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답답함에 피아노의 실리마저 따져보게 된 것.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직업과는 다른 일. 주변의 인정, 최고라는 칭찬이 없더라도 그만 두고 싶지 않은 일로 그림책을 선택했다. 잘 쓰든 못 쓰든 지도 작가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열어 주시는 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부족한 원고라도 쓰는 일을 이어왔다. 원고들은 쌓여가지만, 여전히 좌절은 일상이다. 뭘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에게 슬럼프야 일상이지만 이번에는 센 놈이 찾아왔다. 왜 힘이 드는가? 곰곰이 살펴 보았다. 달리는 체력, 회사 업무, 개인 생활의 바쁜 일정도 한몫했으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자발적 동기로 시작해서 과정을 즐기며 꾸준히 이어온 이 생활은 어느새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남들의 인정과 평가가 어떻든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도리어 두렵거나 흔들릴 때마다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인정과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쉽지 않았다. 모임에 들어가서 부족한 원고를 내고 의견을 주고받을 때마다 자꾸만 작아졌다. 더불어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 보고 싶지 않아도 확인하게 된다. 재능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넘쳐나는 걸까? 비교가 조바심으로 이어지고, 재능이 없는 나에 대한 의심이 찾아온다. 그러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에세이를 읽게 됐다. 1위 없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 수상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의 제자이자,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50년 넘게 활동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런 대단한 분도 재능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하루를 쉬면 도돌이표가 된다며 지금도 매일 10시간 넘게 연습한다는 것을, 임윤찬, 손열음, 조성진 같은 젊은 후배들을 보면서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을 포장하고 감추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잘난 천재들에게 압도당하고,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좌절했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일로 선택한 음악을 잊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연주와 그 가치를 이어 가겠다는 깊은 의지를 보여준다. 야구 심리를 다룬 책 는 4명의 선수(박정태, 김종모, 송진우, 김용수)가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하며 레전드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외적 압박을 내적 동기로 바꿔내어 슬럼프를 극복했다. 이 책의 저자는 메타인지(meta-cognittion, 안다는 것을 아는 것)를 말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힘은,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 자기 일에 가치를 어떻게 부여하는지, 성공을 어느 정도 기대하는지, 내게 그 힘이 있다고 믿는 마음, 슬럼프가 왔을 때 감정을 조절하고 상태를 점검하며 전략을 세우는 힘은 바로 메타인지에서 비롯된다. 남들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진짜 성장임을 깨달은 백혜선 피아니스트와 4명의 선수들. 얼굴이 화끈거리는 스승의 평가, 심각한 부상이나 감독과의 불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 일에 대한 내적 동기로 슬럼프를 성장의 기회로 바꾸고 전설이 되었다. 슬럼프도 과정으로 여기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연아 선수도 TV 프로그램에서 한 번의 대회 결과로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성취 뒤에는 남들의 인정이 아닌 혼자 애써온 꾸준한 연습의 힘이 있었다. 라이벌 아사다 마오가 구사하는 트리플악셀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점프와 기술의 완성도를 높였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이 일을 왜 하고 싶은가를 거듭 질문하고 가치를 스스로 세우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매일 할 수 있는 만큼씩 해 나가는 것이 슬럼프를 벗어나는 방법이다. 내가 이겨야 하는 상대는 바로 나 자신. 남들이 무엇을 얼마나 하는지 부러워하며 재능을 고민할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지속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나를 알아야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슬럼프는 나를 대면하고 알아갈 수 있는 성장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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