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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시대의 가치관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치관을 토대로 선진기업을 모방, 추격하는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이해 불가한 대상은

농경 시대의 가치관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치관을 토대로 선진기업을 모방, 추격하는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이해 불가한 대상은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 ‘워라밸’이다. 워라밸은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의 약자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일만 하고 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오후 6시면 퇴근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자기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중장년층 세대는 워라밸이 싫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않는다고 답답해한다. 일찍 퇴근할 생각만 하고, 저녁 6시 이후면 연락이 안 된다고 불만이다. 농경시대의 가치관을 이어받은 한국식 산업화 가치관과 요즘 젊은이들의 워라밸 가치관은 물과 기름의 관계다. 조화와 화해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산업화 이전의 농경시대부터 생각해보자.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가 쓴 책 에 따르면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농경의 바탕에는 강제노동과 강력한 위계구조가 있다. 조선시대도 당연히 그렇다. 그 이유는 농사일을 하려면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2-5시간 일하던 수렵채집 시대와 달리 농경시대에는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뼈 빠지게 일해야 했다. 씨앗을 뿌려 작물을 키우려면 허리, 무릎, 어깨가 고장이 났다. 오죽했으면 유발 하라리가 에서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게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했을까. 사람들에게 그 힘든 노동을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가지 방법뿐이다. 그에 상응하는 높은 임금을 주거나 강제로 일을 시켜야 한다. 안타깝게도 농경시대에는 높은 임금을 줄 만큼의 생산성은 없었다. 그러니 강제노동이 기본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노비가 총인구의 30~40%를 차지했다. 노비가 아니라고 해도 강제노동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농업 외 다른 산업은 철저히 억압한 조선시대에는 농사 말고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농경 사회는 위계가 철저하다. 강제노동을 시키려면 위계는 필수다. 노동을 시키는 자는 지위가 높아야 하고, 그 노동을 억지로 행하는 자는 지위가 낮아야 한다. 지배계급은 명령하고, 피지배계급은 명령을 수행하는 ‘위계의 가치관’을 사람들은 내면화하게 됬다. 그 가치관은 산업화 시대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 속에서 노비는 없어지고 신분제는 철폐되었으나, 깊게 뿌리박힌 위계와 강제노동의 문화는 어쩌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문화가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됐다. 높은 곳에 있는 경영자와 임원이 결정하면, 아래쪽에 있는 직원들은 그대로 따라서 일을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깐다’가 통했다. 아랫사람에게는 자율이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강제노동’이었다.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었다. 위계의 문화가 옳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상사가 퇴근하며 “지금부터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해서 내일 아침에 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해”라고 지시하면 직원들은 밤새도록 일했다. 불합리하긴 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한국 기업은 빠르게 선진기업을 모방했고 추격했다. 경제도 빠르게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과실의 수혜자가 됐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위계와 강제노동 문화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 문화가 더 이상 충분한 경제적 과실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계와 강제노동 문화로는 혁신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위계의 가치관을 따라 시키는 대로 자율 없는 장시간 노동을 왜 하겠는가? 그 회사에 삶을 바쳐 일할 이유가 없다고 젊은이들은 믿게 됐다. 다시 말해, 위계와 강제노동의 문화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 역시 이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앞서 밝혔듯이 현대 사회에서 위계 문화는 충분한 경제적 과실을 낳지 못한다. 일 자체에서 느끼는 내적 만족도 역시 직원들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자율 없는 장시간 노동에서 일의 의미를 찾을 사람은 없다. 경제적 과실도 낮고, 의미도 없는 노동에 헌신할 젊은이는 없다. 젊은이들의 선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워라밸’이다. 일을 더 시키고 싶다면 법으로 정한 초과 근무 수당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기업의 생산성을 감안할 때, 그런 수당을 주면서 합법적으로 일을 시킬 수 있는 기업은 몇 안 된다. 중장년층인 상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직원을 일찍 퇴근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직원들이 일에 의욕이 없고, 일찍 퇴근해 놀 생각만 한다’라고 말한다. 워라밸이 현재 환경에 적응한 젊은 세대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생각은 못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워라밸 가치관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걱정이 많다. 그 가치관으로 우리 사회의 경쟁력이 유지될까 의문이다. 워라밸은 일과 삶을 대립 관계로 본다는 게 문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말고 균형을 잡자고 한다. 지금껏 일에 치우쳤으니 균형 추를 삶 쪽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일과 삶을 대립 관계로 보는 가치관이 최선일까? 이게 맞는다면 우리는 일에 헌신하지 말고 적절한 수준에서 멈춰야 한다. 그러고도 우리는 과연 글로벌 혁신기업들과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을까? 혹시 도태의 길로 접어드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이제는 제3의 가치관을 찾아야 한다. 위계와 강제노동도 아니고 워라밸도 아닌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일과 삶을 대립 관계로 만드는 모든 악습들을 타파해야 한다. 일을 하면 삶이 의미 있어지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 자율을 줘야 한다. 일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을 통해 전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직원들은 6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를 재운 후에 자발적으로 일을 할 것이다. 회사의 미션이 나의 소명이 되고, 회사 일을 하면 내 소명이 달성되는 그런 직장을 소망하는 건 헛된 꿈일까? 구세대들은 그게 그저 헛된 꿈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 소망이 헛될수록 워라밸의 가치관은 직원들 사이에 더 깊이 뿌리박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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