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의 관성

제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야근이었습니다. 신입이었던 제게 야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선배들에게 야근은 너무나 당연한 루틴이었고, 저녁 5시가 되면 "퇴근 안 해?"가 아니라 "저녁 뭐 먹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정해놓은 것처럼 부장님이 퇴근해야 과장님이, 과장님이 퇴근해야 대리님이, 대리님이 퇴근해야 비로서 저 같은 신입도 퇴근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료들에게 실례였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야근을 못할 때는 사과를 드려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선배들 눈치 보는 것도 피곤해서 아예 속편히 막차 시간까지 사무실에 있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기술 공부를 하면서 야근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뭐, 그런데 다들 딱히 바빠서 야근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웹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선배도 있었고, 아이가 있는 선배들은 야근을 육아 회피 수단으로 쓰기도 했죠.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혼자 육아를 감당하던 아내분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같은 사무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곤 했습니다.


회사-집-회사-집을 반복하는 삶이었지만 야근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대기업이라 야근 수당을 꼬박꼬박 신청할 수 있었고, 연봉이 높지 않던 신입 시절엔 야근 수당이 모이면 나름 쏠쏠했거든요. 당시 자취를 했었는데 저렴한 구내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것도 나름 혜택으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 후에도 야근은 어김없이 이어졌습니다. 입사 첫 주 내내 야근을 했더니, 부서장님은 "개념 있는 경력직이 들어왔다"며 칭찬을 하시더군요. 중간급 개발자가 되자 위에서 이것저것 시키는 잡일이 많아져, 주로 야근 시간을 활용해서 제 본연의 업무인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습니다.


이직한 회사에서는 복지가 더 좋아서 대중교통이 끊길 때까지 야근을 하면 택시를 타고 퇴근하도록 법인 카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야근을 하느니 아예 막차가 끊길 때까지 버틸 때가 많았습니다. 택시 안에서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제 귀한 시간과 회사의 돈이 함께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야근을 하고 캐나다로 넘어왔는데,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야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느낌이랄까요? 오후 4~5시만 되면 모두 자연스럽게 퇴근했고, 저는 그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하루에 8시간 일을 해서는 영 성에 차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홀로 사무실에 남아 야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도 못하는데 남들보다 더 오래라도 일해서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매니저와 1:1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의외의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매니저는 인정은커녕 야근을 하는 저를 상당히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업무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고 야근을 한다는 건 헌신이 아니라 무능입니다. 그리고 그건 팀 매니저인 저의 관리 역량 문제이기도 하죠."


이 말을 듣고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후 동료들을 관찰해보니 정해진 근무 시간 안에 주어진 일을 끝내려고 엄청 애쓰고 있더군요. 점심 시간도 아껴가며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몰입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저는 오전엔 느긋하게 보내다가 오후가 되어야 비로소 일이 손에 잡혔습니다.


매니저의 솔직한 피드백 덕분에 처음으로 저의 노동 생산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근을 너무 오래해서 그런가 하루 아침에 고쳐지지는 않더라고요? ㅋㅋ 계속해서 매니저의 도움을 받으며 야근의 습관을 고쳐나갔습니다.


이제는 저도 아이가 있어서, 퇴근 후에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게다가 블로그 글도 쓰고, 유튜브 영상도 찍고, 그룹 스터디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거든요. 아내 역시 한국에서 저못지 않게 야근을 많이 했었는데, 한국이었다면 어떻게 일과 육아를 병행했을지 깜깜하다네요. 저희 둘 다 야근이 없어지면서 삶의 질이 크게 올라갔음을 느낍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연평균 노동 시간은 최상위권입니다. 반면에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OECD 국가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제도적인 변화(유연근무제, 재택근무, 노동시간 단축 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야근은 미덕"이라는 오래된 인식의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디어에서 요즘 MZ 세대는 더 이상 야근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회 초년생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기존 세대는 말 할 것도 없고요. 한국에서도 더 이상 얼마나 오래 일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생산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조직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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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9일 오후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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