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면평가 (3) - 시스템과 문화 💝💝 유퀴즈 출연은 나에겐 참 느닷없고 번개같은 일이었다. 한국 방문 자가격리 기간 중 연락을 받았고 작가님과 사전 전화 인터뷰를 했고 녹화 당일 두 MC와 인사를 나눴다. 화면에서 나누던 “안녕하세요"가 진짜 첫 대면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 촬영은 약 90분 정도 이어졌는데 예상과 다르게 사전 질문지가 없어서 당황했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답을 했는지 나중에 영상을 보고 알았다. 큐시트를 가지고 인터뷰를 이끄는 유재석님은 내 얘기를 들으며 대화의 중심을 잡았고, 죠셉님의 불쑥불쑥 들어오는 질문은 대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촬영 중간에 스텝 중 한 명의 핸드폰에서 갑자기 Siri가 소리를 내는 바람에 흐름이 끊어졌는데, 유재석님은 웃으면서 “거봐 재도 저렇게 말하잖아"라고 받아쳤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대화를 이어갔다. ​ 촬영이 끝나고 정신이 돌아오고 대화 내용을 기억 해내자 나의 의도가 잘못 편집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생겼다. 작가님께 2가지 요청을 드렸다. 구글이 천재만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과, 다면 평가는 기업문화 토양 없이는 부작용이 매우 큰 시스템이라고 얘기했던 내용이 잘 전달되었으면 했다. 내면의 성숙함 없이 어른 옷을 입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제도의 정착을 위해서는 기업문화의 성숙이 꼭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방송으로 나간 분량, “구글에 천재가 모인 게 아니라, 천재여도 되는 천재일 수 있는, 그런 환경과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회사라는 것이다.” ​ 방송에 나가지 못한 분량, “좋은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공짜 음료 같은 복지가 아니다. 구글의 가장 큰 복지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와 문화다.” ​ 다면 평가 3탄 ​ 다섯째, 시스템 단순히 ‘잘해라'라고 말하는 건 시스템이 아니다.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그 시스템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보완 시스템들이 같이 정비가 되어야 한다. 다면 평가지를 만들고, 룰과 프로세스를 만들고, 설명회를 하고, 그 룰대로 적용을 했다고 시스템이 성공하는 게 아니다. 다면평가제도가 잘 정착한 회사들이 가진 여러 가지 시스템들이 있을 텐데 내가 좋았다고 느꼈던 것들을 적어본다. ​ // 중략 (글이 유난히 길어져서 시스템 사례들은 블로그 링크 글 참조)// ​ 여섯째, 문화 이제 미국에 산 지가 제법 되는데도 여전히 미국식 평가 제도는 나에게 부담이다. 본인 평가서를 쓰지 못하고 백지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여전히 길고, 동료 평가를 요청받았을 때 하나하나 큰 에너지가 들어간다. 실제 평가 결과가 오픈되면 나는 피드백을 잘 읽어보지 못한다. 남들에게 보여진 나를 마주하는 두려움과, 그것을 걸러내는 자존감의 필터링과, 내 것으로 소화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에 읽지 못하고 여러 차례에 나눠서 보기도 하고 아니면 한번 휘리릭 읽고 다시 안 보기도 한다. 감정적으로 무너지거나 자칫 잘못된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를 포함해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구글 혹은 미국식 다면평가 제도를 어려워한다. 특히 겸손을 강조하고 탑다운 문화와 교육을 받고 자란 외국인들의 경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다. ​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중학교를 시작한 딸아이의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보면서 피드백을 주고 받는게 교육과 문화에 녹여져 있음을 실감한다. “<I don’t agree with you> doesn’t mean you’re wrong.”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이들. 내가 당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은 안다. 그래서 그건 엄마 생각이고, 그건 선생님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라고 말할 줄 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본인의 생각>을 키우는 것과 각자의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토론 할 수 있는 게 미국 문화의 저력이 아닐까 싶다. ​ 해나는 한국 초등학교 4학년 때 지구는 둥글지 않고 울퉁불퉁하다고 말했다가 선생님한테 (주제에 벗어나고 수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핀잔을 듣고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인의 생각을 다시 오픈하는데 한참 동안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 한국 기업이 다면평가제도를 채택하여 정착시키려면 미국식 실리콘밸리 인사제도의 도입 자체보다는 문화 정착에 공을 들여야 한다. 신입을 뽑으면 다시 가르쳐야 한다고 컴플레인 할 게 아니라 교육기관에 관심을 가지고 학계에 피드백을 주고 연계하여 문화적 토양 만드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 ​ 대학에 있는 교수님들께 물어보니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달라졌다고 한다. 학생들 간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에 훨씬 적극적이고 피드백 자체도 구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비대면 수업의 효과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국의 관계성 집단 문화를 비대면이 틈을 내어 눈치보면서 자제 (혹은 금기시) 되었던 건강한 크리틱을 연습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매우 고무적인 변화이다. 이렇게 성장한 Z 세대 (아님 비대면 세대)가 사회와 기업에 공정하고 정당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할 것이다. 평가는 성장을 위한 것이고 공정하고 건강한 성장판을 만들어 주지 않는 기업은 새로운 세대에게 외면받을 것이다. ​ 유퀴즈 방송을 보고 그리고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안도를 했다. <지구촌의 능력자>라는 방송의 주제 때문에 구도화되어야 했던 내용이 분명 있었을 테지만, 상당 부분의 내용이 신의 직장 구글에서 잘나가는 능력자가 아닌, 그 안에 살아가는 1인의 삶의 내용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유퀴즈 시스템과 제작진의 문화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촬영 도중 울린 전화 소리에 누구 하나 화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건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진 팀 문화가 하는 일이다. ​ 완벽한 평가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만, 돈 버는 일에 평가를 완벽하게 배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사람이 빠진 점수 매기기식 평가는 다 같이 죽는 시스템이다. 평가의 목적은 성장이어야 하고, 성장의 중심은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