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다른 사람의 문을 열어주며 레전드가 된 사람

1. 칼주름 잡힌 검은색 양복바지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2대8 가르마’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가슴팍에 달린 금속 명찰. 조선호텔 입구에서 만난 도어맨 권문현 지배인(71)의 모습이다.

2. 도어맨은 호텔 서비스의 시작이자 끝이다. 권문현 지배인은 “매일 500번 이상, 많을 때는 1000번씩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숙인다”고 말했다.

3. 도어맨으로 47년 호텔 밥을 먹었으니, 아마도 (권문현 지배인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많이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4. 권 지배인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5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늘 농사를 짓고, 양봉도 했지만 신통치 않았죠. 대구에선 큰누나 단칸방에 얹혀살며 주물 공장에 다녔습니다”

5. “(그러다) 76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처음엔) 터널 공사 현장에서 시멘트 바르는 일을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호텔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던데, 지원해 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번 가본 적 없는 호텔이었지만, 멋진 신세계일 것만 같았습니다”

6. “그날로 면접을 보러 갔고, 5일 만에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도어맨’ 권문현의 시작이었죠”

7. “(도어맨은) 호텔 입구에 서서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합니다. 호텔엔 오전 5시 30분까지 도착합니다. 47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어요”

8. “출근하면 그날 어떤 VIP가 호텔에 오는지, 행사가 있을 경우 인원과 동선도 확인합니다. 퇴근할 때까지 점심시간 30분을 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죠. 손님 차 문을 여닫고, 안내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짐을 옮겨달라거나, 택시를 불러달라거나, 약을 사달라거나 손님이 원하는 건 되도록 해드립니다”

9. “서비스는 디테일(detail)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타고 온 손님은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수증을 받기까지 몇 초가 걸리는 만큼 속으로 ‘하나, 둘, 셋’ 센 뒤 문을 엽니다. 날씨가 덥거나 추울 때도 마찬가지로 차 문을 천천히 열고요”

10. “단골 손님들에겐 한 발 더 들어갑니다. 차에서 내릴 때마다 벗었던 신발을 갈아 신는 습관이 있는 손님도 민망하지 않도록 차 문을 늦게 엽니다. 많이 챙겨주기를 바라는 손님에겐 고개를 45도 숙이고, 부담스러워하는 손님에겐 고개를 15도 숙일 정도로 신경 씁니다. 즐겨 찾는 동선이 있을 땐 먼저 안내하기도 하고요. 어느 서비스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도어맨에게 요구하는 디테일은 그런 것 아닐까요?”

1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특급호텔을 자주 찾는 고객이라면 더 그렇죠. 도어맨은 사람보다 차량부터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단골 이름과 차량 번호, 성향을 함께 기록해 놓는 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개인 차량 번호도 기억합니다. 체어맨 ‘4672’. 많을 때는 350개까지 외웠습니다. 외교관 차량은 국기까지 외우죠”

12. “(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부터 읽습니다. 인물·동정란은 꼭 읽고, 중요한 내용을 스크랩합니다. 특급호텔엔 아무래도 정치인, 고위 관료, 기업인 등 VIP가 많이 오니까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고객에게 “사장님”이라고 정확하게 불러드리면 아무래도 기분 좋지 않겠습니까?”

13. “처음 호텔에 입사했을 땐 손님에게 거수경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VIP가 오면 호텔 앞 교통을 통제하고 로비에 붉은 카펫을 깔 정도였으니까요. ‘과잉 의전’의 시대였죠"

14. “최근엔 예전처럼 손님이 다짜고짜 ‘어이’ 반말부터 하거나 욕하는 경우는 줄었습니다. 하지만 특급호텔인 만큼 손님들이 ‘돈을 낸 만큼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진짜 재벌은 겸손한데, 어중간한 부자가 오히려 안하무인인 경우도 있죠.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도 종종 겪습니다”

15. “(진상 손님을 만나면 괴롭지만) 세상에 만년 갑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일하는 동안 변하지 않은 마음가짐이 하나 있습니다. ‘손님이 왕은 아니지만, 손님은 손님이다’, 손님이 누릴 수 있는 서비스는 최대한 제공하되, 왕이기 때문에 다 해주는 식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16. “손님도 도어맨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 당당한 자신감을 갖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손님 상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는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저의) 원칙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374309?sid=102&fbclid=IwZXh0bgNhZW0CMTEAAR2lhTBcVxjsjw0NbxfKyk2qtz5DfkTGwM6LpHh08mbUIycslJAhyYbljls_aem_K-NWiKoE9zoQeGSizN7INQ

회장님 왔는데 "차 문 열지 마"...47년 '전설의 도어맨' 비결 [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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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왔는데 "차 문 열지 마"...47년 '전설의 도어맨' 비결 [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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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 오전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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