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디자이너인데 이제 제품은 안 만들어요.”

이 말을 처음 꺼냈을 땐 나조차도 낯설고 어색했다. ‘제품’이라는 단어가 물리적 형태를 전제로 하던 시대에 디자인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100개가 넘는 제품을 모델링하고, 생산하고, 시장에 선보이는 과정을 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품’의 정의는 점차 확장되었다. 제품은 결국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가 반드시 ‘물건’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화면 속의 소프트웨어도 ‘제품’이라 불린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형태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제품이 아니라 ‘맥락’을 디자인한다. 버튼 하나가 사용자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 서비스가 일상에 어떤 흐름을 만들어낼지, 시스템이 어떻게 더 인간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 이제는 더 큰 가치를 지니는 시대.

소프트웨어를 디자인하면서 나는 역설적으로 ‘무엇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가’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넘치는 기능보다는 꼭 필요한 최소만을 남기고, 보여주지 않아야 할 것들을 과감히 덜어내는 일. 물리적 제품에서 벗어난 지금, 오히려 더 본질적이고 사람이 중심인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말한다.
"실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시뮬라크르만이 반복된다."

우리는 이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를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재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 손에 잡히지 않아도 더 오래 기억되는 경험들. 더 이상 형태가 ‘실재’를 증명하지 않는 시대, 의미와 경험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가고 싶다.

이제 제품이란, 어쩌면 더 이상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Forsit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제품디자이너의 미망록 혹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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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8일 오전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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