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퇴사를 했다.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으니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메일 마지막에 '직함'이 아닌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름 석 자를 쓸 때마다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소속으로만 평가받지 않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다. 그런데 사람들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자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프리랜서로 일하고 계세요?"라고 묻는다. 백수라고 부르기 미안해서 그런 걸까. 자꾸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뭐해서 아예 스스로 소속을 정했다. 친구와 함께 백수 듀오 '두낫띵클럽(Do Nothing Club)'을 결성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지나치게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친구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자는 취지로 만들었는데, 덕분에 '클럽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직업이 없는데 직함이 생기다니 뭔가 어리둥절한 기분이지만. 머리를 하고 싶은 날이면 아침부터 사람들 머리만 눈에 보인다고 했던가. 나를 소개하는 일에 신경을 쓰면서부터 다른 사람들 소개가 유독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직업이나 소속이 아닌 자기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친구가 꽤 많았다. 누구보다 문구를 좋아해 책까지 낸 친구는 자신을 '문구인(文具人)'이라고 정의했고, 독립 출판을 하여 여러 권 책을 출간한 친구는 프로필에 책의 링크와 "달리기, 정준일, 글쓰기를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고양이 4마리를 키우는 유튜버 크리에이터 친구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고양이 넷 사람 하나'라는 한 줄이 쿨하게 쓰여 있다.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다니 뭔가 낭만적인 상황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현실적이다. 좋아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득이 된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한다든지 나답게 살아가는 '덕후'가 성공하는 시대라는 거창한 결론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 내 경우에는 장인급의 기록 '덕력'을 갖추진 않았어도 늘 무언가를 기록할 만큼 기록을 좋아한다. 종이 노트나 메모 앱은 물론이고 구글 문서, 브런치, 페이스북, 유튜브 등 다양한 수단을 기록의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따로 기록을 하는 '영감계정'까지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일하면서 혹은 일상에서 꾸준히 써온 기록을 모아 책도 냈다. 기록을 쌓아가는 데 집착하긴 하지만 나의 기록에도 기준이 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무조건 받아 적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만의 언어로 기록할 것. 즉 내게 기록은 나라는 사람을 찾아나가는 과정인 셈이다. "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나를 소개한다. 일로 표현할 땐 '마케터'로, 행동으로 말하고 싶을 땐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을 땐 '인스타그래머, 블로거, 유튜버'로 소개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백수 듀오 두낫띵클럽의 클럽장이다." 얼마 전 쓴 책에 쓴 내 소개 일부다. 내가 잘하는 것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남들이 불러주는 나 대신 내가 부르고 싶은 나로 채운 소개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건 분명 든든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명함 한 장으로 내 쓸모를 보여주고 싶진 않다. 평생직장과 평생 직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시대는 분명 지났고,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①나를 세상의 기준대로 규정하지 않을 것. ②나를 여러 개의 자아로 규정할 것. ③그리고 내가 규정한 대로 변화해갈 것.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올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내 이름은 내가 부를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이승희 마케터·'기록의 쓸모' 저자 2020.06.29 글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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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30일 오전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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