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 : '네버 스타터(never stater)'

01. 2년 전쯤 어느 작가분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청중 한 분께서 이렇게 본인의 사연을 소개하시더군요. "저는 슬로우 스타터에 속하는 편인데요. 그래서인지 무슨 일을 하든 불타오르기까지가 좀 오래 걸리고 그 사이에 방전되는 에너지도 많습니다. 작가님은 어떤 성향이신가요?" 02. 그러자 작가님이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슬로우 스타터면 뭐 어떤 가요. '네버 스타터(never stater)'만 아니면 되죠. 속도 차이와 역량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결국 성패를 가르는 것은 한 가지라고 봐요. '일단 시작하고 보느냐 아니면 결코 시작하지 못하느냐.'" 03. 어떤 성향을 단어로 정의해버리면 그 임팩트는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 풀어 설명하면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특정한 단어로 인식을 선점해버리면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긴장하게 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제겐 '네버 스타터'라는 표현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작하는 데 있어 수많은 고민과 망설임을 가진 사람들, 실패가 두려워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표현이기도 했으니까요. 04. 다행히도 저는 '네버 스타터'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려봅니다만, 사실 주위에서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쉽게 그 한 걸음을 떼지 못하죠. '생각 중이고, 고민 중이다', '좀 더 나은 방향과 방법을 찾고 있다',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 (마음의 준비 포함)', '타이밍을 보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뭔가 트리거가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는데 팍 꽂히는 게 없다'. 05. 물론 이 모든 결정도 개인의 자유이자 의지겠죠.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일에서도 삶에서도 배운 교훈 중 하나는 '딜레이(delay)는 아주 높은 확률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뭔가를 해보고 이게 아니다 싶어 방향을 트는 것은 꽤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끈기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 또한 작은 도전이자 새로운 두근거림과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다소 방향 전환이 잦더라도 이를 응원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06. 반면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오랜 시간 동안 그 어떤 시작도 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정말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해야 한다'라는 사실과 '하고 싶다'라는 감정에는 극히 동감하면서도 절대 움직이지 않거든요. 업무를 하건 생활을 하건 이런 유형의 사람들과 엮이면 사실 좋은 영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세상의 모든 이유를 끌어와서 '지금 내가 시작하지 못하는 사연'을 여러분께 소개할 테니 말이죠. 07. 몇몇 책을 보다 보니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스타트 포비아 (start phobia)'와 혼동해서 설명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너무 큰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는 '네버 스타터'와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적어도 그들은 무엇인가를 시작했고 그 과정 속에서 어려움과 시련을 겪는 것이기에 시작도 못한 사람과는 의지의 측면에서나 경험의 측면에서나 고민의 질이 차이 난다는 게 제 사견입니다. 08. 무작정 무엇인가를 해보라고 부추길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만약 여러분이 '네버 스타터'에 해당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주위 사람들이 먼저 여러분을 파악하고서 더 이상 무엇인가를 제안하지도, 독려하지도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람 본성이 요상하게 비슷해서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시작부터 해보는 사람이 더 인간미 있어 보이거든요. 09. 더불어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스스로 '작은 저지름(?)'을 만드는 게 이 네버 스타터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돌이키기엔 꽤 큰 비용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포기하면 나 자신이 민망해질 정도로 아예 주위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쌩판 모르는 사람들 무리에 비집고 들어가도 괜찮고, 나중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 지언정 우선은 당장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허접하게 시작해보는 것도 정말 멋진 용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10. 내일이면 '우리우리 설날'이라고 작은 변명을 댈 수 있는 새해가 밝습니다. (어차피 시작은 '구정'부터야라는 말이 이토록 유용하다니요...) 그러니 새해에는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이루지 못할지언정 우리 테이블 위에 문제만 올려두고 있는 사람은 되지 말자구요. 딜레이는 시간도 갉아먹지만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또한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말이죠.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또는

이미 회원이신가요?

2023년 1월 20일 오후 4:30

 • 

저장 27조회 2,55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