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가드너는 ‘한 분야를 통달하기 위해서는 10년이상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창조적 거장들의 공통 기질로 10년 규칙을 발견하고,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고 했다.


피카소는 4살에 시작해 10대에 거장이 되었고, 10대 후반 창조의 노력을 시작한 스트라빈스나 무용가 그레이엄은 20대 후반이 되어 비로소 창조성의 본 궤도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이 창조적 거장들의 공통적인 기질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삶을 사는데 있어 기본이라고 본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 살지 못할때가 많기에 최선이라는 말앞에 한없이 작아지긴 하지만, 사소한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삶 전반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그 자체 만으로도 아름답다.


최선이란 또한 현재성을 띈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돌아서서 보면 다시 아쉬워지고 부족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자신이 처해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뜻밖에도 많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신 과거의 시간, 혹은 미래의 시간을 그리워하거나 동경하는 것으로 현재를 대체 시킬 때가 있다.


멀리 있는 것에는 관심과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진실에 무관심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소중히 여기면서 가까이 있는 가족은 소홀하거나, 죽음은 중요하게 여기면서 삶은 소홀한채 간혹 방치하기도 한다. 고향에 있을때는 타지를 그리워하고, 타향에서는 고향을 그리워 한다.


학교 다닐때는 빨리 졸업하기를 원하고 졸업하고 나면 학창시절이 가장 그립다고 하소연 한다. 미혼일때는 결혼을 꿈꾸고 결혼 후에는 다시 처녀 총각 시절을 그리워 한다. 어디 이뿐인가. 하다못해 짜장면을 시키고 나면 꼭 짬뽕이 먹고 싶어진다. 정작 짬뽕을 시키면 짜장이 먹고 싶어질테지만...


물론 이런 것들이 부정적인 요인만은 아니다. 추억이나 향수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과거, 또 공간적으로는 바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그리워 하면서, 정작 이순간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이토록 괴로워 하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내일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오늘 최선을 다하지 않음은 죄악인지도 모르겠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므로 잡을 수 없고, 현재는 잡는 순간 과거가 되므로 잡을 수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역시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우리는 영원히 현재를 사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과거를 살고 있지도 않으며, 미래를 살고 있지도 않다. 오로지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산다면 그것이 곧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http://www.bhgoo.com/2011/85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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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3일 오후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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