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주의 애티튜드] 나에 대한 애티튜드
한국대학신문 - 411개 대학을 연결하는 '힘'
사물도 지능을 갖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지식을 대체하고, 빅데이터가 개인의 취향은 물론 마음까지도 읽어내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력과 협업능력이다.
굳이 4차 산업혁명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창의성은 예술대학의 가장 중요한 이슈다. ‘어떻게 하면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을까?’는 교수가 된 후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는 명제다.
창의력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그전에 가져야 하는 믿음이 있다. 자신감이다. 할 수 있다는 느낌, 이길 수 있는 믿음.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자신감이 없으니 뭐를 해도 남의 것만 따라하고, 눈치를 본다.
‘제 의견은 이겁니다.’ 내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 내 생각을 말하면 이상하다 할까봐 아예 할 생각도 않고, 빨리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잘한 것을 살짝 베끼거나 비슷하게 말하거나, 트렌드만 쫒는 따라쟁이가 된다. 오로지 ‘튀지 않게’가 모토다.
그러다 보면 내 생각 따윈 아예 없어진다. 자신감이 없으니 신이 나지 않고, 창의성은 고사하고 생존만을 위해 전전긍긍하다 보면 스트레스만 쌓이고, 나의 재능은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한 채 소멸된다. 에너지는 고갈되고, 삶은 피폐해진다.
필자는 자신감을 ”못 한다 왜! 못하면 어때?” 식의 배짱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말하는 ‘존버’, 버티는 힘이 자신감이다. 다 잘할 수도 없고, 다 잘할 필요도 없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설령 내가 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나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 찾아 보면 될 일이다. 나는 나다. 이것이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원래 ‘근자감’이다. 자신감은 무슨 근거를 들어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능력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명의 존재가치를 믿는 것이다. 남에게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게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면 된다.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남 눈치를 보는 에너지를 내 눈치를 보는 데 사용해야 한다. ‘남’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백 수천 이상이기 때문에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하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남보다 나에 집중하는 ‘나는 나’ 배짱이 필요하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 나에 대한 애티튜드다.
얼마 전 학생들과 장래 진로에 대해 상담했다. 학생들은 보통 어느 회사에 가려고 하거나, 사회에 나가기에는 너무 부족해서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런데 한 학생이 모든 대륙에서 1년 이상씩 사는 것을 계획하고 있고, 생계를 위해서 강아지 미용이나 교원자격증을 따려고 한다고 말했다.
적당히 벌고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우리는 꼭 무엇이 안 돼도 된다. 성공하지 않아도 날마다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내 삶은 무엇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냥 내 모습 이대로, 내 생명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없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나를 나로 대하고, 나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나에 대한 올바른 애티튜드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남과 다른 나의 삶에 충실할 때 비로소 우리들 고유의 창의적인 정체성은 발현된다.
창의성은 아티스트나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고, 호흡하는 모든 생명은 창의적일 때 존재 가치를 느끼고 행복하다. 나는 나다. 나로 살 것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나에 대한 애티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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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8일 오후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