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드는 왼손이 아름다운 이유 (Feat 한주간 '챗GPT' 사태를 보며)

01. 혹시 이번 한 주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들은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챗GPT'였습니다. 중요한 개념이 급부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 저 역시 일하는 필드가 IT이기 때문에 더 이 개념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죠. 뉴스와 SNS는 물론이고 친한 동료들과 대화하는 사적 자리에서조차 챗GPT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02. 대신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챗GPT의 개념이나 특징, 동향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서점에는 챗GPT에 관련한 책도 있더라구요..? 언제 썼을까요..) 03. 오늘 개발자 동료들과 이야기하다가 '그래서 챗GPT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라는 궁금증에 다달했을 때쯤 누군가가 '초안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줄 것'이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 순간 저도 '오!'하고 탄성을 질렀죠. 2주 전 챗GPT에 대한 기사가 스멀스멀 소개될 때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요. 04. AI 능력이 고도화될수록 주문한 명령에 따른 결과물도 훨씬 완성도 있게 바뀌겠지만 그중 1차적인 활용도는 아마 '드래프트(draft)'로서의 방향성을 확인하는 용도'일 겁니다. 쉽게 말해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 첫 단추를 풀어나가는 기초 공사를 우선 챗GPT에 맡겨보자는 심리가 꽤 일반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보고서도, 리포트도, 판결문도, 연설문도, 하물며 기초 연구와 나아가 문제 자체를 정의하는 것도 챗GPT에게 먼저 물어보는 세상이 오는 거죠. 05.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1차적인 작업을 해주면 이를 고치고, 다듬고, 입맛에 맞게 수정하는 게 훨씬 쉽다고 여깁니다. 창작보다는 판단을, 방향 설정보다는 궤도 조정이 리스크도 적고 부담감도 적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머릿속에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것들, 잘 모아지지 않던 아이디어들이 타인이 만든 1차 작업물을 보는 순간 디벨롭의 용기를 얻게 되죠. 06. 따라서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완벽한 내러티브의 작업을 내놓는 AI가 개발되기 전까지, 혹은 AI가 창작한 작업물을 아주 높은 확률로 찾아내고 걸러내는 기술 시스템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이 '드래프트 의존성'으로의 챗GPT가 활용될 확률이 매우 높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봅니다. 07. 다만 이 '초안을 설정하는 방법'을 등한시하거나 나아가 그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조금 심각하게 말해 인간의 오리지널리티를 잃는 행위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단순히 'AI가 대신해 주는 게 무슨 의미냐'라는 포인트를 떠나 우리의 특수한 능력이자 상징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무섭고도 슬픈 일이니 때문이죠. 08. 몇 해 전 워싱턴 포스트가 버지니아텍과 함께 제공한 특집 기사에서는 '인간은 갈수록 검색 능력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기술이 너무 발전해서라기보다는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방향성을 개입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인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죠. 대신 누군가가 깔아놓은 피드나 타일 형태의 정보에서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것을 셀렉하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바야흐로 '보여라. 나는 판단하겠다'의 시대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09.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기회를 위협으로 오인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한 번쯤은 현상 이면의 깊숙한 곳에서 제기되는 본질적인 물음에 답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대사가 감동을 주는 것도 진짜 힘을 실어야 하는 그 순간에 정말 미묘한 밸런스를 잡아주기 위해 존재하는 '왼손'이라 아름다운 거니까요. 무엇이 슛을 쏘는 손이고 무엇이 거드는 손인지 정도는 구분하는 인간으로 남아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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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8일 오후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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