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리 말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죠. 근데 저는 이 말이 지닌 본뜻과는 다르게 이걸 실현하려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 언제 물이 들어오는지 그 타이밍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어떤 물살에도 굴하지 않고 노를 잘 저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이 말은 '시기에 대한 예측성과,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모두 갖추라'는 말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02.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과 만나면 늘 이야기 주제로 떠오르는 두 가지가 '트렌드'와 '플랫폼'입니다. 지금의 시대에는 어떤 것이 트렌드고, 앞으로는 어떤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를 받아줄 플랫폼은 또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느냐가 늘 관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우리에게 떠오르는 근본적인 물음은 조금 다른 것에 맞춰집니다. 바로 '우리가 정말 예측할 수 있을까'하는 거죠.
03. 마케팅이나 브랜딩처럼 트렌드가 중요한 베이스가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예측해 보려다가 실패하고, 그럼에도 또 새로운 것을 예측해 보려고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과정을 밟아나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다수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생하는 마음으로 트렌드의 동선을 예측해 볼 겁니다. 이미 뜬다 싶은 트렌드의 뒤를 쫓아 뭔가를 준비하면 그게 완성될 때쯤엔 또 다른 것이 트렌드로 각광받을 테니 말이죠. 참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04. 그래서 저는 트렌드 자체를 예측하려 애쓰기보다는 '트렌드의 변화 속에서도 내가 여전히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어떤 물이 들어오더라도 나름의 대응을 할 수 있는 노젓기 방식 정도는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죠.
저는 그것이야말로 트렌드의 변화 속도가 광속에 이른다는 요즘의 시대에서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05.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정말 중요하겠죠. 내가 가진 노젓기 방식이 눈앞의 파고에서 제대로 먹힐지를 분간하는 게 핵심이니 말이죠.
제가 이런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자기 객관화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06. 하나는 최근 각광받는 분야가 있다면 그 트렌드 속에서 내가 잘하는 것이 어떤 장점을 발휘할 수 있고 어떤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지를 최대한 정확히 예측해 보는 겁니다. 챗GPT가 뜬다, AI가 뜬다라고 하면 그냥 그 트렌드 자체를 분석하기보다는 밀려들어오는 물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배를 띄워보는 겁니다. 그럼 그때부터는 이 트렌드라는 것이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되기 시작하는 거니까요.
07. 두 번째는 소위 뜨는 트렌드 속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는 플랫폼들이 나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파악해 보는 겁니다. 참 신기한게 A라는 트렌드가 뜬다고 해서 그 흐름을 받아주는 플랫폼이 정확히 A의 모습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본인들은 B,C,D로 모양을 변형하고 발전시키면서 트렌드를 흡수하기 때문에 트렌드와 플랫폼은 꼭 일치하는 모양새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 트렌드가 어떤 방식으로 풀어지는지를 보면서 나를 저런 플랫폼에 던져도 괜찮을지를 고민해 보는 게 참 중요합니다.
08. 15년 전 모바일 시대가 열렸을 때 모두가 앱을 만들면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알았더랬습니다. 하지만 그중 의미 있는 앱이자 서비스로 살아남은 건 0.0000001%로 안된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앱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모바일이라는 트렌드 속에서 우리 서비스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예측하고 더불어 앱이라는 플랫폼에 우리를 던져도 무방할지 고민하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객관화에 성공한 서비스들은 지금 우리가 하루에도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사용하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트렌드와 플랫폼의 상관관계를 이해한 덕분이죠.
09. 그러니 여러분도 '물들어 올 때 노 저어야 한다', '요즘 뭐가 트렌드 인지 촉수 바짝 세우고 들여다봐야 한다'라는 말에 현혹되기 전에 정확한 자기 객관화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저 트렌드가 세상을 반쯤 뒤집어 엎어놓을 만큼의 파급력이 있다고 해도 그게 정확히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세상의 판에서 나는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그러니 저는 저 속담에서 '들어올 때 저어야 한다'라는 동사보다는 '물'과 '노'라는 명사에 더 주목하게 되더라고요.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채로 뭔가를 한다는 건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