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도 안 읽은 걸 대체 왜 추천하는 거죠?

01 . 몇 해 전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영어 원문을 번역해놓은 자료라 명확하게 제목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런 문장이 헤드라인에 걸려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이 아티클 역시 완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공유할 것이고, 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고, 다시 재생산할 것이다.'

꽤 특이한 제목의 이 기사는 원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오로지 공유하거나 코멘트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꼬집기 위한 기획 기사였습니다. 특히 SNS를 포함해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알리는 것에만 집중할 뿐 온전히 집중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을 점점 등한시한다는 것이죠.


02 .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배우 정우성 님도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영화인들이 영화계 어렵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배우 중에도 영화 잘 안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일인데 영화를 보지도 않고서 영화계가 어쩐다 저쩐다 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이 말만 들으면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가 경험한 몇몇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였다는 걸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의견을 강조하거나 공유하는 것에 심취한 나머지 눈 앞의 콘텐츠에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으니 말이죠.


03 . 대표적으로는 앞서 소개한 기사의 내용처럼 자신도 제대로 읽지 않은 콘텐츠를 추천하고 공유하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뭐 당연히 너무 좋거나 반가운 콘텐츠를 만나다 보면 선공유 후감상도 할 수 있는 법이죠. 하지만 '누가 뭐라고 말했다' 혹은 '누가 이렇게 했다더라'라는 그 단편의 메시지 몇 줄만 보고서 전체의 감상을 아우르는 메시지를 던지는 건 엄격히 말해 남을 기만하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끝까지 보지도 않은 영화를 최고라고 추켜세우며 추천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할 테니까요.


04 . 예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책 추천사 카테고리로 들어가면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감사한 기회로 저도 종종 다른 분들이 출간하는 책에 추천사를 쓸 기회가 있지만 그때마다 제가 정중히 요청드리는 것 중 한 가지는 책 전문을 모두 읽고 나서 추천사를 작성할 수 있도록 최소 일주일의 시간은 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론 이틀 만에 추천사를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심한 경우에는 온라인 서점에 올라가는 도서 요약 정보만 전달한 채 시간이 촉박하니 추천사 먼저 작성해 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죠. 그런 사람들이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출간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실망을 넘어 화가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05 . 그렇다고 단순히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에만 화가 나느냐 하면 그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을 금치 못하는 진짜 주된 포인트는 바로 본인조차 그 콘텐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기회와 시간조차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군요...) 오직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해당 콘텐츠를 교묘히 이용한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정말 좋은 콘텐츠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대신 그 콘텐츠를 알릴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자신이 주목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06 . 반론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죠.

'그 사람이 그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싫으나 좋으나 사람들이 열광하는 포인트가 있을 텐데 그걸 존중해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백종원 대표님이 직접 먹어보지도 않은 채 어느 식당이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맛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들께 '너무 맛있었다'는 표현을 쓰며 추천한다면요? 곽튜브나 빠니보틀이 실제로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리뷰하며 '여기 너무 좋았다'고 극찬하며 여러분에게 강추 여행지로 소개한다면요? 이건 좀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07 . 개념 설명을 위해 비약에 가까운 예시를 들긴 했지만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저는 적어도 대중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추천할 때는 그 유형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흥미롭다 (혹은 재미있겠다) 그러니 우리 지금부터 같이 즐겨보자'는 스탠스입니다. 둘째는 '나는 온전히 그 콘텐츠를 소비했고 또 나는 충분히 만족했으므로 여러분들에게 추천한다'는 스탠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콘텐츠를 온전히 소비했음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비평이나 또는 내 관점에서의 새로운 의견을 덧붙이고 싶기 때문에 입을 연다'는 입장입니다.


08 . 당연히 이 세 가지는 본질 자체가 다르고 사람들에게 전달되기까지의 단계 역시 구분됩니다. '아직 안 보긴 했는데 여러분들에게 추천드리고(?), 동시에 이 콘텐츠에 대한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는 마치 '아직 배송이 안 와서 써보지는 못했는데 너무 좋네요. 여러분에게도 적극 추천드리고 앞으로도 이런 물건 많이 팔아주셨으면 해요'라는 가정형 미래 화법의 고객리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논리는커녕 인과관계조차 성립될 수가 없는 의견인 것이죠.


09 . 세상에 즐길 거리가 워낙 많다 보니 한 사람이 온전한 하나의 콘텐츠를 소비하기가 힘들어진 것은 맞습니다. 때문에 그저 간보기 식으로 찍어서(!) 리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질보단 양, 양보단 속도라는 생각으로 일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슈를 선점하려는 사람들 역시 점점 늘어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리뷰를 하고, 의견을 내는 사람들의 얄팍한 행태를 모두 감싸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그런 것은 그런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 또 지켜야 할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10 . '나는 저렇게 목소리를 내는 인플루언서가 아니니까', '나는 SNS에 개인적인 주장 안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우리 실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는 것이 더 슬픈 현실입니다. 리뷰를 부탁하는 동료의 콘텐츠를 두고 대충 눈으로 읽고서 자기 감상을 추가하는 것에 더 열을 올린 적은 없었는지, 중요한 내용을 정리한 메일의 한두 문장만 본 다음 '일이 이렇게 굴러가고 있구나'라는 현실 왜곡형 자기 해석만을 떠안고 다른 이슈로 눈을 돌린 적은 없는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반성해 볼 지점이 분명히 있어 보이니까요, 내 의견을 한 줄이라도 추가하고 싶다면 우선은 그 콘텐츠에 집중하는 것이 예의이자 윤리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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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일 오후 12:12

댓글 2

  • 저도 드라마나 영화 평점이나 리뷰 쓸 때 모두 감상하고 나서 작성합니다. 그 작품에 대해서 모두 감상하고 나서 그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리뷰 쓸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 아무도 몰랐던 금융상품이 돌았던 2008 금융위기처럼 언젠가 콘텐츠의 위기와 거품이 터질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