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의 단골 스타벅스 매장에 갔다. 메뉴판을 잠시 바라보았다. 익숙한 커피들이 보였다. 평소 늘 마시던 것들. 한 번쯤은 벗어나고 싶었다. 단정한 차림을 한 직원 앞에 섰다.


“주문하시겠어요?“(직원)

”네, 혹시…여기서 제일 인기 없는 메뉴가 뭘까요?“(기자)

직원은 이게 뭔 말인가 싶어서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했다. 이내 능숙한 추천이 이어졌다.

”음, 저희 매장에서는 이 음료가 가장 안 팔리고 있어요.“(직원)

“그럼 그걸로 주문할게요!”(기자)


메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에스프레소와 흑당 시럽과 시나몬의 다소 낯선 조합이었다. ”시나몬 괜찮으시겠어요?“ 주문할 때 들린 직원 말이 조금 불안했지만. 별수 없다. 이미 결제는 끝났다.


기다린 음료가 나왔다. 흑설탕과 우유와 커피가 적절히 섞인 오묘한 색깔. 한 입 먹어봤다. 솔직히 첫 모금은 살짝 의아한 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기울어졌다. 반려견 똘이에게 “빨주노초파남보!”처럼 모르는 단어를 말하면 머리를 갸우뚱하는데 그것과 비슷했다.


먹는 방법이 잘못됐나 싶어서 컵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섞었다. 덜그럭덜그럭. 얼음이 유리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어우러지고 나니 맛이 썩 괜찮아졌다. 뭐랄까? 수정과에 커피를 섞은 낯선 맛인데 중독성이 있었다. 음료는 금세 사라지고 바닥엔 얼음만 남았다.


갔던 길을 또 가고, 먹던 걸 또 먹고, 보던 걸 또 본다. 남들이 좋다는 걸 막연히 쫓고 알고리즘 추천을 받는다. 무표정하게 있어도 최적의 것을 알려준다. 좋다. 매우 효율적이며, 불안한 것도, 실패하는 것도 줄일 수 있으므로.


그러다 문득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갇혀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막연히 벗어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가 별로여도 상관없다고. 평소 익숙했던, 또 반복해왔던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심하게 떠나본 작은 모험 기록.


취재를 하며 켜켜이 쌓인 감정 정리가 필요했다. 합정동 서점에 가기로 했다. 마음과 일치하는 적절한 문장엔 화도 슬픔도 내려보낼 수 있기에. 오랜만이라 가는 길이 헷갈렸다. 지도 앱을 켰다. 버스 타면 20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경로가 나왔다.


편안함에 의지하고픈 마음을 누르고 앱을 껐다. 끄는 순간 바보가 됐다. 갈 방법이 생각이 안 났다. 길이 있으면 가겠지, 용기를 냈다. 내 멋대로 경로를 짜봤다. 어느 구간까진 따릉이(자전거)를 타고, 양화대교는 걸어서 건너가기로.


햇살 좋은 날이라 한강 바람을 쐬고 싶었다. 꾸역꾸역 페달을 밟았다. 땀이 금세 줄줄 흘렀다. 버스 에어컨 바람이 그리워졌다. 괜히 했나 싶어 후회했다. 아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버스로 다니던 찻길.


자전거를 타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길을 쫓다 알아채고, 자조(自嘲)했다. 그럴 필요 없었다. 그 뒤로는 내 맘대로 길을 탔다. 골목길도 지나고, 공사라 차가 못 가는 길도 홀연히 건넜다. 아무렇게나 길을 가니 몹시 자유로웠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기꺼이 돌아가고 마음껏 헤매었다. 서울에 처음 여행을 온 사람이 된 듯 했다. 정 안 될 땐 지도를 봤다. 하나라고 생각했던 길은, 가보니 실은 너무 많았다. 버스나 지하철이나 차로만 갈 수 있다고 여겼으나 아녔다. 자전거나 걸음으로도 갈 수 있었다.


고생스럽고 시간은 더 오래 걸리던 여정. 그러나 단지 그게 다는 아녔다. 안양천에 다다랐을 땐 초록이 무성한 산책길을 만났다. 흙을 밟고 싶어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순간 음악을 듣고 싶어 앱을 켰다. 자연스레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려다 멈칫했다. HOT 100이나 해시태그가 잔뜩 달린 추천 음악 같은 것에서도 잠시 해방돼 보고 싶었다.


새로 나온 음악을 전부 재생해봤다. 평소 안 듣던 온갖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무명 가수도 많았다. 덕분에 그들이 품고 있을 꿈도 하나씩 들어볼 수 있었다. 음악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좋은 곡들을 꽤 건졌다. 특히 가사가 마음에 들어왔다.


“여름이 오면 푸른 햇살 아래 두 손을 꼭 맞잡고 산책을 하자던. 네가 좋아하는 버드나무 길.”<손혜은 - 여름이 오면>

“자꾸 생각이 나. 어찌 된 건지 몰라. 오늘 뭘 해도 안 돼. 너만 생각이 나.”<유해준 - 자꾸 생각이 나>


양화대교를 건널 무렵엔, 강렬한 트롯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리듬이 신나고 가사가 너무 재밌어 웃음이 빵 터졌다. 합정동까지 1시간이나 걸렸고 힘들었으나 재밌었다. 익숙한 동네인데 다 새로웠고,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점에 들어섰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엔 베스트셀러들이 놓였다. 유명한 책들이라 제목이 익숙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 잘 보이는 곳마다 MD의 추천 책이 놓였다. 평소라면 뒤적거렸겠으나, 그날은 스쳐 지나갔다. 좋은 책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며.


책이 잔뜩 꽂힌 벽면에 갔다. 어지러웠지만 불편함을 택하면 또 무언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숨을 고르고 제목을 찬찬히 보았다. 마음에 뭔가 떠오르면 꺼내어 읽었다. 꽤 오래 서점에 머물며 찾아낸 좋은 책의 문장들.


“위로는 반드시 말이 아니라, 어떤 풍경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나에게 위로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이고, 할아버지의 주름진 웃음이고, 코스모스 색깔의 가을 하늘이고, 김창완 아저씨의 노래이다.” <고수리 -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지금의 인생 옆에 또 하나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살아가는 것이 편해진다.” <이치다 노리코 - 올해의 목표는 다정해지기입니다>


“에고는 필사적으로 안전을 원한다. 반면 영혼은 진정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한 가지 진리는 이것이다. 모험 없이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시련 없이는 깊어질 수 없다는 것.” <캐럴 피어슨 - 나는 나>


많이 팔리고 오래 팔린 책. 최소한 실패하진 않을거란 ‘보증’이었다. 밥 먹을 때도 그랬다. 별점은 몇 점이고, 재주문은 얼마이며, 후기는 어떤지 편히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맛있을 때도 있었고, 예상과 달리 별로인 적도 꽤 됐다. 당연한 거다. 누군가의 입맛이지, 정확히 내 경험은 아니므로…


허기가 몰려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끌리면 들어가 보자고. 마침 초등학생이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쥔 컵 떡볶이의 발그레한 소스가 너무 맛나 보였다.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기자)

“(움찔) 네에.”(움찔한 초등학생)

“혹시 이 떡볶이, 어느 가게에서 샀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기자)

“여기 짱 맛있어요. 쭉 가시면 O떡볶이라고 나와요!”(신나서 알려주던 초등학생)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게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골목이었다. 맨날 가는 데만 다녔구나 싶었다. 가게에 들어갔다. 쫄깃하면서도 알맞게 익어 보들보들한 떡볶이. 입에 넣는 순간, 오래 전 기억이 꺼내어졌다. 학원이 끝나면 책가방 메고, 한 접시에 1000원 밖에 안 했고, 친구와 먹으면 세상 행복했던. 딱 그 맛이었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였다. 잘 모르니까 검색했다. 비싼 여행 아닌가. 두려웠다. 아무 데나 갔다가 혹시나 맛 없을까봐. 검색했다. 맛집이라고 나온 곳에 갔다. 잠시 뒤 여성 두 명이 들어왔다. 한국인이었다. 커플도 왔다. 한국인이었다. 테이블이 한국인들로 꽉 찼다.


몽마르뜨 근처였나, 기억도 안 난다. 맛도 가물가물하다. 대체 거기는 누구의 ‘선택지’였을까? 앞서 했던 작은 모험들. 대단한 교훈이 담긴 메시지는 없다. 엄청 즐거웠으나 오롯이 재밌는 것도 아녔다. 외려 약간의 불안이 늘 있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았다. 오롯이 “내 선택”이었으므로.


처음 알게 됐다. 선택지가 남들이 다 쫓는 것에만 있지 않단 것을. 나만의 방법도 괜찮단 걸. 이번엔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다 껐다. 검색창 하나만 덜렁 띄워진 화면. 뭘 찾아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알아서 주어졌던, 왜 보는지 모를 영상들에.


찾고 싶었던 게 뭘지 생각한다. 고민한다. ‘강아지’를 입력했다. 조회수가 높은 것 위주로 나온다. 날짜 순으로 나열했다. 30명이 본 것도 나오고, 55명이 본 것도 떴다. 빠짐없이 다 나왔으면 싶다.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골라 보고 싶었다.


기억을 하나 더 꺼내본다. 어느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였다. 맛있다며 찾아간 유명 카페는 휴일이었다. 검색하려는데 인터넷이 안 터졌다. 대안이 없는 상태에 순간 정지됐다. 별 수 없이 그 옆의 아무 카페나 들어갔다. 라떼를 마셨다. 검색해도 결과값이 하나도 없던, 기대 하나 안 했던 그 가게. 그런데 거기가 스페인에서 먹은 커피 중 가장 맛있는 곳이었다.

스타벅스 가서, "제일 안 팔리는 걸로 주세요"[남기자의 체헐리즘] -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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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6일 오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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