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파타고니아를 만든 건 '세련된 콘텐츠 마케팅'이었습니다>
1. 1979년 이본 취나드와 그의 아내 멜린다는 기능성 아웃도어 브랜드를 창업했다. (바로) ‘파타고니아'였다.
2. 그 후, 마모트, 노스페이스, 시에라 디자인스, 콜롬비아 등 기능성 아웃도어 용품을 개발하는 파타고니아의 사명에 동참하는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늘어났다.
3. 파타고니아는 경쟁업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었고, 문화 혁신을 통해 프리미엄 브랜드로 성장했으며, 일부 제품에 업계 최고 기준의 소매가격을 책정한 회사였다.
4. (창업 후) 수년 동안 파타고니아의 주요 브랜딩 도구는 ‘대형 카탈로그’였는데,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제품에 대한 설명 사이사이에 이야기와 에세이 그리고 사진 보도 등을 추가한 잡지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5. 1980년대 말부터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세련된 야생의 모험을 추구하는 중산층 잠재고객들의 숨은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공식을 따랐다. 우리가 인터뷰했던 많은 소비자들은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가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마치) 잡지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6. (특히) 파타고니아는 (독자들에게) 카탈로그를 통해서 고생스러웠던 야생의 모험에 관한 사진과 에세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 카탈로그는 내부자들 사이에 인기 있는 ‘사랑방' 역할을 자청했다.
7. 또한 파타고니아는 (전문가들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아니라), 대중시장의 소비자들을 품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대중 시장 소비자들에게 야생의 세상에 동참하라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8. 파타고니아가 이룬 문화적 혁신의 핵심은, 극한의 모험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파타고니아는 ‘현장 보고서'를 발행했다. 현장 보고서에는 아슬아슬한 야생 모험의 위험과 스릴에 관한 직접적인 체험담이 담겨 있었다.
9. 이런 극한의 야생 모험에 관한 생생한 후기는 중산층 미국인들이 열망하던 강철 같은 의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10. (또한)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특정 장소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절대 일반적인 등반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발길이 닿지 않는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오지를 하이킹했다. 따라서 이런 모험에 대해 (사진 등을 통해) 그저 ‘살짝'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사회적 문화 자본이 만들어졌다.
11. (게다가)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야생의 모험이 가지는 세련미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매 호마다 숨 막히는 자연경관을 담은 사진을 꼭 실었다. 그리고 그런 사진은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 작품과 같이 구도에 특히 신경을 썼다.
12. 집채 만한 파도를 근접 촬영한 사진, 자이온 국립공원의 웅장한 바위를 찍은 파노라마 사진 등 모험의 대상은 물론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런 숭배는 파타고니아의 모든 카탈로그에 실린 사진에서 여실하게 드러나며, 가끔은 에세이에서도 그런 숭배가 묻어났다.
13.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는 자연을 경외심과 심오한 미학적 경험을 안겨주는 대상으로서 가장 순수하고 조금도 때 묻지 않은 형태로 묘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를 본 독자들에게 힘든 모험을 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힘든 줄을 모르는 낭만주의적인 이상을 상기시켰다.
14. (이처럼) 파타고니아는 놀랄 만큼 강력한 카탈로그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타고니아의 카탈로그를 우연하게라도 한 번 보고 나면 사람들은 코스모폴리타니즘적인 극한적 야생의 모험에 헌신하는 삶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15. (특히) 1980년대 말부터 미국의 중산층은 이런 코스모폴리타니즘적인 극한 모험가 집단에 (자신이) 참여한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파타고니아는 핫한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타고니아의 연 매출은 크게 증가하여 2억 달러를 상회했다.
- 더글라스 홀트 외, <컬트가 되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