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담당자로서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성장이 과연 내 덕분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성인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었다고 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즉각 변화시키지 않는다. 꾸준한 운동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균형잡힌 식단이 몸에 이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특정 정보가 진정 나의 것이 되려면 그 정보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특별한 의미는 강의나 교육을 수강하는 동료와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새롭게 부여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삶에서 직접 마주치는 도전적인 상황을 해결하고자 할 때 기존에 있던 정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역할을 맡으며 마주친 과제,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 타인과의 갈등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이런 과제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해결책을 탐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 만나게 된 정보나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들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한다. 그 동안 배웠던 다양한 지식과 정보들은 이 과정에서 선택 가능한 정보의 범위와 대안이 된다.
교육은 사람들을 즉각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문제 상황에서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고 세분화 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선택하고 활용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특정 상황에서 성장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탐색하고 관점과 생각을 바꾸고 스스로 행동을 변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습관과 관행대로 문제를 인식하고 특별한 변화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따라 어떤 반응을 하느냐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진정한 성장과 변화는 그가 갖고 있던 가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질문이 들어오기 전까지 꽤 길게 유지된다.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성공 방식과 규칙, 효과적인 문법을 적용해도 문제 해결이 어려울 때 사람은 자신의 가정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은 바로 이 시점에 한 개인이 갖고 있던 기존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수준으로 의존했던 기존 정보와 법칙을 의심하고 다시금 새로운 정보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이해를 넘어서 동의와 수용의 과정을 거쳐 아주 작고 실험적인 실천이라도 하게 된다면 매우 훌륭한 교육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가정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이 trigger가 되어, 필요한 순간에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은 성장에 직접 도움을 준다기 보다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교육의 역할, 특히 기업 교육이나 성인 교육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질문을 재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타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교육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성장’이라는 단어를 왜 불편하게 느끼는지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교육 담당자로서 나는 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가 그토록 조심스러울까?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성장’이 대부분 미래적인 시선의 ‘수직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래와 같은 글을 찾았다.
“방향이 아래를 향하더라도 너 스스로 뛴다면 그건 나는 거야”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5번 레인]이라는 소설에서 ‘강버들’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다. 강버들은 촉망받는 수영 꿈나무였다가 체육 중학교 진학 이후 경쟁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이빙으로 종목을 바꾸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이제 더 이상 수영 꿈나무도 아니고 사람들의 기대에서 멀어진 강버들이지만 그는 현재의 삶을 이전에 비해 퇴보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현재 본인의 삶도 꽤 괜찮은 삶이고 충분히 가치 있는 삶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가 담긴 대사이다.
‘성장’은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왠지 모를 의무감을 부여한다. 실은 어디가 정확히 앞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 걷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시선을 계속 전면을 향하게 만든다.
앞과 뒤를 구별하고 아래와 위를 구별하여 현재의 상태보다 미래의 상태를 ‘더 나은 앞’이나 ‘더 나은 위’로 정의한다. 만일 성장이 계단을 오르는 일이라면 우리는 끝없이 ‘계속 계단을 오르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기도 한다.
계단의 끝은 어디인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찰없이, 다른 사람들이 지금도 계단을 오르고 있기에 나 역시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변화를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통해 조금 다른 현실을 만드는 일‘로 정의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위해 조금 더 현실에 집중하고 그 선택에 도움이 될만한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까?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의 역할과 행동을 좀 더 깊게 고민해보지 않을까?
교육 담당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시도하도록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다양한 재료들을 제시하여,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그 재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편안하게 때론 용기있게 새로운 선택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아쉽지만 성인들에게 선택과 결정을 강요할 순 없다. 필요한 상황이 되면 사람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대안과 필요한 재료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성장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의 대안들을 갖게 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만일 성장의 개념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그래서 앞 과 뒤, 위와 아래와 같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는 풍성함으로,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지는 문제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면 나는 내 일을 ‘타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