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일 벌이기 좋아하는 스타일'이신가요? ]
01. 어릴 땐 그저 부모님의 흔한 잔소리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도 '어지럽히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라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함을 깨닫곤 합니다. 다만 생활이 아닌 업무 영역에서는 이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과업도 혼란에 빠지고 조직원 간의 감정의 골도 깊어진다는 문제가 있죠.
02.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평가는 그래서 양날의 검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크고, 추진력이 있고, 일과 조직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빨리 타오른 만큼 금방 식어버리고,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한 채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버리고, 일의 순서와 방향보다는 속도감만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따를 위험도 있기 때문이죠.
03. 솔직한 심정으로는 세상에 양면이 모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매한 포지션에 머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나 분명하게 잘하는 쪽이 더 낫다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단점과 리스크를 경계하지 않은 채 장점만을 꾸준히 부각하는 태도는 사회생활에서 꽤 위험한 스탠스라고 봅니다. '전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거든요'라는 말이 '그러니 저를 어시스트하고 주워 담는 역할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해요'라는 투로 비치면 안 되니까요.
04. 저는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자격은 '버릴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방 청소를 해주시다가 "제발 이거 좀 치워라. 아님 좀 버리든가!"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아! 그거 내가 지금 쓰는 거라고.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냅둬!"라는 말대꾸해보신 적들 없으신가요? (물론 저도 그 정도로 네가지가 없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만..)
05. 그런데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걸 새로 하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정리가 필요해요"라고 말할 때마다 "그건 그거고 일단 이것도 해야 해"라는 식의 답변을 받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멘붕에 빠지거든요. 그렇다고 "그럼 사람을 더 뽑자"거나 "전문 에이전시에 맡기자"라는 것도 해답은 아닐 겁니다. 동료들이 걱정하는 포인트는 단순히 리소스의 결여에만 머물고 있진 않거든요.
06. 그래서 저는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을 때는 늘 Phase를 나눕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나 제 보고를 받을 관리자들이 이 일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어떤 단계로 발전해갈만한 볼륨인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각자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어느 부분을 정리해야 하고 또 우리가 신경 쏟고 있는 다른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끌어와야 하는지를 상기시킵니다.
07. 한편으로는 저도 너무 조심조심하는 모양새 대신 멋들어지게 비전을 제시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이게 우리의 새로운 먹거리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엔 박수갈채를 받을 거고, 당신들의 커리어에도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고 포장하고 싶은 마음도 있죠. 근데 그러면 뭐 하나요. 어차피 이를 함께 끌고 나가야 할 사람은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동료들인걸요.
08. 그러니 늘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우선 두 가지를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이걸 하기 위해서 우리가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일은 앞으로 몇 단계를 거쳐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예정인가' 하는 겁니다.
더불어 절대 떠올려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일단 벌여놓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해결하겠지'라는 생각이죠.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옵션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09. 예전에 함께 일하던 분께서 퇴사 후 스타트업을 창업하셨습니다. 본인 업무의 절반 이상은 협업할 파트너를 만나고 다니는 업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파트너를 선정하는 자신만의 한 가지 준칙을 말씀 해주셨습니다.
"저는 회사의 대표나 PO들이 '저는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친구가 그걸 정리하고 각종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있죠'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과는 협업하지 않아요.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 그럼 저분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거군요?'라는 생각뿐이니까요."
10. 혹시 또 새로운 일 하나를 벌이고 싶으신가요? 하지만 그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믿을만한 구석'이 오직 동료들뿐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설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만에 하나 '내 역할은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세상에 그것만 하고 살 수 있는 포지션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