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길을 가다 우연히 고교 동창을 만났다. 서로 결혼은 했는지, 회사는 잘 다니는지, 그동안 별일 없이 잘 지냈는지…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다음에 보자'는 어색한 인사를 나눈 채 헤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할 말이 없는 것과 달리, 매일 만나는 친구들과는 작고 쓸데없는 이야기의 줄기가 끊이지 않는다. '놀면 뭐하니'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싹쓰리가 부른 노래가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최근 문을 연 동네 파스타 집이 기대와 달리 얼마나 맛이 진부했는지, 아침부터 배가 아파 고생했다는 생활형 하소연까지, 몰라도 아무런 지장 없는 '티엠아이(TMI·Too Much Information)'를 주고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친밀감은 깊어지고 관계는 공고해진다. 가끔은 신변잡기적 수준에 머무르던 대화가 인생 상담으로 넘어가기도 하니, 작은 이야기의 영향력을 만만히 볼 일은 아니다. 일상 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티엠아이의 효력은 발휘된다. 예전에는 회의라 하면 명확한 '어젠다(Agenda)' 아래 불필요한 이야기 대신 핵심만을 말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나마 사전에 예고된 회의는 해볼 만했다. 대신 상사가 설루션을 찾아보자며 갑자기 소집한 회의에서는 대단한 의견을 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할 말 없는 것처럼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다 누군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의견을 내면 열심히 받아 적은 후 다음 회의를 기약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성공적으로' 끝난 회의들을 떠올려보면 접근 방식부터 달랐다. 처음부터 완성된 아이디어를 내놓기보다 동료들과 쓸데없는 티엠아이를 남발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기발한 생각들이 차례차례 얼굴을 내밀었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온 자잘한 이야기들은 쌓이고 다듬어진 끝에 '주인이 없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일놀놀일, 말 그대로 일을 놀이처럼 하고 놀면서 재미있다고 느낀 것들을 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늘 '티엠아이'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과 놀이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카테고리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크리에이티브"라는 유명 디자이너 말을 빌리지 않아도, 경계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기존 상식을 넘어선 창의적인 생각이 요구된다. 정답이 아닌 정답에 가까운 답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따라가기 쉬운 변화는 아니지만 피할 수 없다면, 티엠아이로 가볍게 체질을 바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티엠아이는 내 생각을 부담 없이 던질 수 있는 힘을 키워준다. 스스로 아이디어 진입 장벽을 낮추는 건 중요하다. 둘째, 티엠아이는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해준다. 서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많을수록 이해하기 쉽기에 상대 티엠아이를 듣는 건 다른 사람 의견을 수용하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말이 안 통할 것 같던 사람과도 티엠아이를 통해 대화 물꼬를 틀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 티엠아이야말로 내 생각의 '거리'가 된다. 사람들이 몰리는 유튜브나 소셜미디어 역시 누군가가 충실하게 쌓아올린 티엠아이의 소산물 아닌가. 심지어 요즘은 잘 만든 한 장짜리 보고서 대신 티엠아이가 가득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링크를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제껏 본 적 없는 반짝거리는 생각을 찾기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들 티엠아이 세상을 들여다본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티엠아이를 양산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승희 마케터·'기록의 쓸모' 저자

[밀레니얼 톡] 티엠아이의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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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2일 오전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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